부산도시철도 4호선 석대역. 여기는 땅 밑이 아닌 지상 구간이다. 열차 문이 닫히고, 전동차는 스르르 영산대역으로 달린다. 4호선 지상 구간이 승객에게 주는 큰 선물은 경치다.

4호선 전동차는 차창이 널찍한 '파노라마 창문'이다. 게다가 지상 구간 경치는 독특하게 아름답다. 해운대 쪽 산들의 신록 풍경이 차창을 가득 채우다가, 곧 아기자기 올망졸망한 반송 쪽 동네 풍경이 정겹게 이어진다.

이때 전동차 안에 음악이 흐른다.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에 나오는 '여자의 마음'인데, 국악으로 연주한다. 경쾌하고 섬세한 느낌으로 미뤄 가야금 같다. 연주 시간은 80초로 제법 길다. 경치와 음악 덕에 "도시철도 덕분에 문화생활을 하는구나!"하고 잠깐 즐기는 시간이다. 이 한 구간짜리 음악방송을 영산대가 제안한 것인지 부산교통공사가 정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작고 세심한 '문화적 배려'로 도시철도 타는 일이 때때로 즐거워진다.

이와는 반대되는 일 또한 작고 세심한 요인 탓에 생긴다. 이 또한 도시철도 이야기다. 1호선 남포역에 닿을 때 부산의 문화유산을 알려주는 방송이 나온다. 내용은 이렇다.

"지금 도착하는 역은 우리나라 유일한 도개교, 영도대교가 있는 남포, 남포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근대사의 중요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영도대교 도개행사는 매일 낮 12시부터 15분간 열립니다."

도시철도 안내방송 같은 공공언어는 그 사회의 문화역량을 상징하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시민의 언어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고, 어린이가 따라 배우며, 나라 안팎 관광객이 언제나 보고 듣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꼴이어야 하고, 격조를 갖춰야 한다.

날마다 저 방송을 들으면서 '근대사의 중요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이란 대목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근대사'도 역사이고, '역사'도 역사인데 동어반복 아닌가? 이런 의심이 드니, 좋은 취지의 이 방송이 거슬렸고 아름답지 않았다. 그래서 동료 기자와 소설가 몇 명에게 사정이 이러한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변을 종합하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별 걸 신경 다 쓴다!"

아니라니까. 이건 공공언어라고! 깔끔하고 올바른 언어를 써야 해! 문화도시는 '디테일'(작고 섬세한 요소)에 달린 거라고. 이렇게 항변했지만, 메아리가 없다. 포기할 수 없어 한글학회부산지부에 문의했다. 이 학회 허경무 회장은 "의미가 중복되어 보기에 따라서는 어색하다고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 의견도 같았음을 말씀드립니다"라는 답신을 보내왔다.

내처 국립국어원에도 물어봤다. 국립국어원은 홈페이지에 '공공언어 지원' 영역을 따로 두고 공공언어 다듬기 운동도 하고 있어 더 미더웠다. 국립국어원 답변의 핵심은 이러했다. "'근대사'와 '역사'가 반복되어 어색한 표현입니다."

일을 도모하다가 작고 사소한 요인을 잘 챙기지 못해 뜻밖에 실패했을 때 흔히 이렇게 말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절반만 맞다. 왜냐하면 '천사도 디테일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작고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요소를 잘 다듬으면, 그 작고 사소한 힘이 천사가 되어 도시 문화를 가꿀 수 있다. 문화도시는 '디테일'이 살린다. 그러니 '근대사의 중요한 역사'는 한 번만 더 고민해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