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주택가 작은 공원에서 펼쳐진 셰익스피어 연극. 전문 극단의 배우들이 2시간30분에 걸쳐 열연했고 관객은 잔디밭에 눕거나 앉아서 공연을 즐겼다.

- 자본의 논리가 사회 지배는 오산
- 프로 배우·연주가들 무료 공연
- 거대한 단체서 동네 체육관까지
- 명망가·시민 자발적 기부로 운영
- 명단 눈에 띄는 곳 게시 등 대접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돈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자본주의 미국의 모습을 처절하게 보여주는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베네수엘라 출신 천재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이 이끄는 LA 필하모닉 공연을 보기 위해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 간다고 하자. 티켓 값이 만만찮다. 무대에서 가장 먼 좌석이 70달러이고 무대 앞에서 두다멜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곳은 200달러가 넘는다. 지갑에 돈이 많다면 200달러가 넘는 티켓을 사고 23달러로 대리 주차를 하면서 귀족처럼 공연을 즐길 수 있다. 반대로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가장 싼 70달러 티켓을 구매하고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주위를 빙빙 돌면서 5달러 내외의 싼 주차장을 찾으면 된다. 주차비가 아까우면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LA의 한 체육관 입구에 공개된 기부자 명단.

그런데 가장 싼 티켓을 살 여유조차 없다면? 대부분 시민에게 70달러짜리 콘서트 티켓은 부담스럽다. 그것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돈이 없다면 문화생활을 즐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무료 공연을 찾으면 된다. LA에서 대표적인 것이 매주 일요일 오후 6시 LA카운티미술관(LACMA)에서 열리는 무료 클래식 콘서트다. 무료라고 얕보면 오산이다. LA 필하모닉 단원이나 세계적 연주자들이 참가하고 공연 수준도 높아 클래식 전문 라디오 방송에서 생중계할 정도다. 이 때문에 300석 가까운 콘서트홀은 매주 가득 찬다.

LACMA의 무료 콘서트는 한 가지 예다. 찾아서 즐기려면 얼마든지 있다. 이곳에서 경험했던 무료 공연 중 가장 이색적이었던 것은 주택가 작은 공원에서 벌어졌던 셰익스피어 연극이었다. 무려 2시간30분 분량의 연극은 무대 장치 하나 없는 공원 잔디밭 위에서 열렸고 관객은 잔디밭에 눕거나 앉아서 즐겼다. 배우들은 아마추어가 아니라 전문 극단의 프로였다.

나무 의자에 붙은 기부자 안내판.

미국 사회는 철저하게 돈에 따라 움직이지만 앞에서 예를 든 것처럼 잘 들여다보면 누구에게나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굳이 문화뿐만 아니다. 미국의 부유층이 산다는 베벌리 힐스의 초호화 백화점 인근에 당당하게 문을 연 굿윌 매장을 볼 수 있다. 굿윌 매장은 세계적인 복지경영 조직인 굿윌 인더스트리스가 운영하는 곳으로 개인이나 기업으로부터 기증받은 물건을 판매하고 얻은 이익을 장애인 재활에 사용한다. 굿윌 매장은 시민에게 인기가 높다. 조금만 발품을 팔면 5달러 내외의 돈으로 새것이나 다름없는 유명 브랜드의 셔츠나 청바지, 재킷 등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장황하게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 돈이 많지 않아도 기회나 혜택(질적인 차이는 있지만)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은 기부 문화를 소개하기 위해서다. 무료 콘서트나 연극, 굿윌 매장을 가능하게 만든 힘은 기부다. 미국의 기부 문화는 상상을 초월한다. 거대한 단체나 시설은 말한 것도 없고 심지어 동네 조그만 체육관도 기부로 운영된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기부자다. 돈이 많거나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만 기부하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시민도 자신의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기부할 수 있다. 실제 LA 지역의 유명한 해변 거리에 설치된 예쁜 나무 의자에 조그맣게 붙은 기부자 안내판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의자를 기부한 주인공은 인근에서 30년 동안 주유소와 자동차 정비소를 경영한 동네 주민이었다.

이처럼 미국은 기부가 일상화돼 있다. 기부가 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다. 그래서 기부자에 대한 대접이 극진하다. 기부자 이름을 딴 재단이나 건물을 흔히 볼 수 있고 가장 접근성이 뛰어나고 보기 좋은 곳에 기부자 명단을 자랑스럽게 공개한다.

미국을 단순히 자본주의 국가로 여기고 자본의 논리로만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미국을 유지하고 끌어가는 기부 문화를 이해해야 미국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미국에서 배워야 할 두 가지를 꼽는다면 단연 기부 문화와 이전에 소개했던 도서관이다.

그동안 그렇게 많은 문화와 제도를 미국에서 들여왔는데 왜 기부와 도서관은 제대로 수입해서 이식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이 물음에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