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복구 씨가 22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창작집 '맨밥'(문학수첩)에 실린 작품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 부산작가들 "오래 기다렸다" 환영

"드디어…"라는 반응이 가장 많았다.

소설가 이복구(69) 씨의 새 소설집이 갓 나왔다는 소식은 부산 소설계에 빨리 퍼졌고, 많은 동료 작가는 이를 듣고 "드디어"라는 말로 환영의 발언을 시작했다. 책이 시중에 깔리기 시작하자마자, 안목 높은 독자이기도 한 동료 소설가들한테서부터 '오래 기다렸다'는 요지의 인사를 듣는 이 행복한 작가는 누구인가.

이복구 작가가 새 창작집이자 등단 43년 만에 두 번째로 펴낸 소설책인 '맨밥'(문학수첩)을 내놓았다. 이 작가는 1972년 '불구경'으로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한다. '불구경'은 부산 소설가들 사이에서 지금도 "빼어난 작품" "강렬한 등단작" 사례로 거론될 만큼 강한 인상을 남겼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가 1970년 말에 제대한 뒤 단 1년 만에 문제작을 내놓으며 등단한 26세 작가를 문단은 눈여겨보았다. 하지만 이 작가는 1973년부터 노동야학 대성학교 운영에 뛰어들면서 10년 동안 사실상 절필 상태에 들어간다. 1983년 잡지 '소설문학'이 그를 찾아내 특집으로 다루면서 다시 소설을 발표했고, 이는 1993년 첫 소설집 '불구경' 발간으로 이어졌다.

'맨밥'은 첫 소설집 뒤로 다시 22년이 흐르고서야 나왔다. 이복구 작가의 책 발간 소식에 많은 이가 반색하는 것은 단순히 세월 때문이 아니다. 그는 작품 수가 많지는 않지만, 그간 꾸준히 문예지 등에 신작을 발표해왔다. 부산 소설계에서 그는 작품 세계가 도저하고 두터우며, 창작하는 태도가 진지하고 엄정한 작가로 확고하게 인정받는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의 새 소설집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았다. 오랜 기간 나온다 나온다 하던 책이 '맨밥'으로 결국 결실을 보자 부산 소설계에서 "드디어"가 유행어가 된 것이다.

"삶이 바쁘고 복잡했으며 나도 어영부영했지만, 책을 빨리 내야 한다는 조바심이 크지 않았다.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자기 검증도 있었다. 이제 소설가로 활동하기에는 훨씬 편한 환경이 됐다. 전작 장편소설이 두 편 있고 단편도 꽤 써놓았으니 이제부터는 내 책이 꾸준히 나올 것 같다." 이 작가의 집필-발표-출판 시스템이 이제 확실히 복구됐다는 메시지로 들렸다.

새 창작집 '맨밥'에는 소설 6편을 실었다. 그는 허무주의란 게 허무 자체가 목적이 아니란 점을 잘 생각하자고 했다. "인생을 진지하게 살면 허무는 만나게 됩니다. 허무의 끝으로 사람이 가보면 무엇이 있을까요. 비로소 삶을 껴안을 수 있는 절대긍정이 있을 겁니다." 그는 스피노자와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들어 이 점을 설명했고, (서양문학의) 큰 작가치고 이 같은 허무를 만나지 않은 이는 없다는 말을 들려줬다.

수록작 '식물의 시간'은 허무의 극한까지 밀고 올라가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교통사고(자살기도로 볼 수 있는)로 식물인간이 됐다가 3년 15일 만에 깨어난다. 말하자면, 한 번 죽어본 사람이다.

세속적인 성공과 안정, 딸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던 그는 깨어난 뒤 삶에 다시 희망이 비치는 기미와 허무의 밑바닥(죽음)까지 가 본 사람 특유의 상태에서 헤매다가 다시 자살을 기도하는 포즈를 취한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이 소설은 절망이나 허무를 위한 허무가 아니라 어떤 희망의 기미를 제시한다.

표제작 '맨밥'은 동생들과 가족을 위해 평생 희생한 형님이 자기 임무를 거의 끝낸 말년에 이르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야기가 씨줄이다. 이런 형님을 위해 마음을 쓰고 선의를 베푸는 갈빗집 사장인 부자 동생, 헌신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날줄이다. 이 작품 또한 작가가 말한 '허무의 끝에 무엇이 있나, 존재에 대한 절대긍정과 환희의 기미가 있다'는 철학적 문답을 생각할 때 더욱 생기를 띤다.

유치원생의 눈으로 세상을 위악적으로 또는 끔찍하게 그린 '짖는 아이', 권력과 명예욕에 눈이 멀어가는 세태를 서늘하면서도 풍자적으로 그린 '돌산',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은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에 있다는 '매직 아워', 쓰레기 하치장을 무대로 한 '미친 발' 등 수록작은 '클래스가 다르다'는 느낌이 다를 만큼 묵직하다.

이 작가는 "다르게 새롭게 세상을 보고 표현해보고자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