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큰 명절, 설을 우리 고유의 시가인 시조로 느껴보자. 본지는 설을 맞아 부산시조시인협회(회장 백승수)에 "설 명절 기운을 잘 느끼게 해줄 시조를 추천해 달라"고 의뢰했다. 설빔 차려입고, 차례 지내고, 세배 올리며, 떡국 나눠 먹고, 윷을 노는 설은 한민족의 큰 명절. 설을 느끼는 데는 한국인 문화 DNA를 간직한 시조가 으뜸이라! 협회는 회원들에게 설에 관해 쓴 작품이 있거든 보내 달라고 알린 뒤, 접수된 시편을 본지와 함께 나름의 기준으로 골랐다. 모두 부산 시조시인이 창작한 현대시조이며 설의 분위기와 의미를 함께 고려했다. 시조와 설은 맛깔스럽게 어우러졌다.


◆ 귀성(歸省) - 변현상

얼마나 굶었는지 폭식을 한 고속도로 온종일 끙끙거리며 복통을 호소했다



그래도 웃으며 가는 회귀(回歸)하는 연어 떼



변현상 시인의 '귀성'은 체증이 심한 고속도로를 '폭식'에 비유했다. 귀성 행렬은 어떤 역경에도 회귀본능을 잃지 않는 연어에 빗대 느낌이 참신하다.

3-5-4-3 음보율을 기본으로 한 종장이 힘 있고 멋스럽다.


◆ 새해 새날은 - 안영희

길손처럼 오지 말고

친구처럼 오십시오



지난해 모진액운

더불고 떠나시어



새날은

구석구석을

은혜롭게 하옵소서.



안영희 시인의 '새해 새날은'이 이어진다. 설은 새해를 시작하는 날이다. 귀성 전쟁을 뚫고 한자리에 모인 가족 친지가 덕담 나누는 모습이 선하다. 설날 아침 고운 다짐처럼 울리는 시조다.


◆ 놋그릇, 꽃 피다 - 정희경

분가한 오빠에게 제사를 물리시고

놋그릇 한 벌씩을 건네시는 어머니

꽃대의 무게중심이 꽃잎으로 번진 날



종부의 긴 침묵이 고봉밥에 담겼다

몇백 년을 궤짝에서 저들끼리 얽혀서

굵게 밴 쓴맛 짠맛이 닦여서 지워진 길



살풋 건드리면 종소리 울리는 저녁

노란 국화 짧게 꺾어 소복이 담는다

어머니 늦은 팔십 평생 환하게 피고 있다



정희경 시인의 '놋그릇 꽃 피다'는 소박하고 정갈하다. 설에 차례 지낼 때 지닐 마음가짐을 보여준다. '살풋 건드리면 종소리 울리는' 놋그릇은 정초에 마음을 가다듬게 한다.


◆ 뿌리 - 김덕남

똑바로 선다는 건 누군가의 힘이다

저 땅속 서로를 끌어안고 버텨 온 사랑

무성한 숲을 이루려 아래로만 뻗는다



문명의 허공 딛고 빌딩숲 올라간다

김 오른 밥상 앞에 내일 향해 기도하면

낮춰라 흙내음 맡아라

엄마 말씀 들린다



별자리 딛고 섰는 지구는 안전하다

저들끼리 소통하여 모판으로 얽어매면

꽃피고 열매 맺는다

유성비가 내린 날



김덕남 시인의 '뿌리'는 설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설에 조상에게 절하는 뜻은 뿌리를 간직하는 데 있다.


◆ 종가(宗家), 까치 울다 - 김정

꽃담 밖 무임 빌라 까치 우는 아침이다

굴뚝엔 연기 폭폭 서정을 토해내고

붓을 든 목련 가지는 입춘첩 적고 있다



뒤집은 솥뚜껑에 배추전 지지대고

몇 대대 공덕인 듯 탑을 쌓은 시루떡

유세차(維歲次), 물 한 그릇도 조상 은덕이겠다



허리춤에 감춘 바람 휘몰이로 내리치면

멍석 위 떨어지는 모야, 모야! 고함소리

독립군 만주벌 가던 할아버지 닮았다



치자꽃 담아낸 듯 고명 얹은 떡국 먹고

그 동안 잘 지내셨니껴? 웃어른께 세배가면

댓돌 위 큰 기침 소리 버선발로 내려선다



김정 시인의 시조 '종가, 까치 울다'가 대가족 설 풍습을 아련하게 담는다.정감 있고 경쾌한 시조의 음악성이 맑게 울리고, 잘 다듬은 시어가 설 정경을 감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