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1592년(선조 25년) 6월 서애 류성룡(柳成龍·1542~1607)은 조선에 파병 온 명나라 군대를 응접하는 업무를 전담하고 있었다. 평안도 현지를 직접 점검하면서 정주, 안주 등지를 오갔는데, 그해 11월 정주에서 나라의 시급한 정무에 대해 올린 차자(箚子)의 초고(草稿)가 바로 부산박물관 소장 '류성룡 필(筆) 진시무차(陳時務箚) 초고'(사진)이다.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111호. 세로 39.2㎝인데 가로는 무려 311.8㎝나 된다. 116행의 반초서로 씌어 있다.
1633년(인조 11년) 간행된 서애집(西厓集·서애 선생 문집)에 '진시무차' 전문이 수록돼 있는데, 이것과 초고는 일부 차이를 보이긴 해도 상당 부분이 같다. 아무래도 초고를 작성한 뒤 첨삭한 부분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더욱이 이 초고는 고문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유일본이라는 점에서도 사료적 가치가 크다. 임란 당시 위정자의 시국관과 국난 극복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초고는 국난 중 민심 규합책, 강원도 산척(山尺·사냥을 생업으로 하는 자)을 복병(伏兵)으로 활용한 왜적 공격책, 한양 수복 방법과 호남의 곡식을 활용한 영남 백성의 구제책, 유격전 적극 활용 등을 담고 있다.
이를 더 자세히 들어다보면, 먼저 국난을 극복하는 희망은 민심이므로 군공, 작상, 면천, 면역 등 규정을 만들고 군대와 민간인이 왜적을 잡아 얻은 것은 당사자에게 지급하는 등으로 민심을 수습하면 적의 형세가 약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강원도 산척을 복병으로 삼아 왜적을 토벌하게 하면 북로(北路)로 왕래하는 왜적은 허리 부분이 끊어져서 동남의 형세가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적시했다. 경상도에 흉년이 들어 민심이 불안하므로 풍년이 든 전라도 곡식을 운반해 경상도를 구제해야 한다는 내용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