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속 탐정인 필립 말로가 사무실을 연 곳으로 추정되는 할리우드 거리의 한 건물. 건물 관리인과 인근 주민에게 물었지만 모두 챈들러나 말로를 알지 못했다(왼쪽). 오른쪽 사진은 미국 UCLA 서점에 진열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본지는 5일 자부터 격주로 월요일 지면에 'LA 통신'을 연재합니다. 미국 LA에 체류하고 있는 김희국 기자가 직접 보고 겪은 다양한 미국 문화와 사회 현상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미국 LA는 영화 도시다. 해마다 할리우드를 구경하기 위해 엄청난 관광객이 몰려온다. 또한, LA는 류현진이 활약하는 메이저리그 다저스의 홈이며 강렬한 햇살과 해변, 서핑의 도시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에 하나를 추가하고 싶다. LA는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1888~1959)의 도시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챈들러라는 이름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먼저 챈들러가 어떤 작가인지 소개하겠다. 그는 1930~50년대를 풍미했던 범죄소설 작가다. 그의 작품 '빅슬립' '안녕 내 사랑', '기나긴 이별' 등은 당시 미국인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고 영화나 드라마로도 제작돼 인기를 누렸다. 문학사적 면에서 챈들러는 형용사 등 수사를 최대한 쓰지 않고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하드보일드 문학의 토대를 닦은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 필립 말로는 차갑고 냉소적인 성격을 지닌 독특한 인물로, 당시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도 모자란다면 결정적인 한 가지를 덧붙이겠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독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몇 년째 거론되는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존경하는 작가 중 한 명이 바로 챈들러다. "챈들러는 1960년대 나의 영웅이었다"고 하루키가 공개적으로 말했을 정도다.

그렇다면 왜 LA가 챈들러의 도시일까. 챈들러의 소설 배경이 할리우드 영화산업과 석유사업으로 돈을 모은 벼락부자들의 욕망이 뒤섞인 1930~50년대 캘리포니아였고 탐정 필립 말로가 사무실을 열고 활동한 무대가 LA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LA에 정착한 뒤 문학기행을 다닌다는 기분으로 챈들러의 발자취를 좇았다. 하루키는 알아도 챈들러를 잘 모르는 국내 독자에게 챈들러의 진면목을 보여줄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푼 기대는 미국 서부 지역 명문대학 UCLA 서점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서고를 가득 메운 책 속에서 챈들러의 소설은 보이지 않았고 눈에 띄는 좋은 자리에는 하루키의 소설이 진열돼 있었다. 서점 직원에게 챈들러 책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더니 '빅슬립' 한 권뿐이라고 했다. 그는 더는 미국인이 챈들러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독서를 하지 않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원인이라고 답했다. 신기한 것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하루키의 소설은 미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사정은 미국 최대 서점 체인인 '반스 앤 노블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책만 외면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도 사라지고 있었다. 서점 순례 대신 선택한 것은 탐정 필립 말로의 사무실 찾기였다. 챈들러 정도의 작가라면 LA시가 그를 기리기 위해 작품에 등장하는 사무실 주소에 작은 안내판이라도 세웠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것 역시 순진한 상상에 불과했다. 일단 LA 어디에서도 말로의 사무실 위치에 관한 정보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인터넷을 뒤져 예전에 말로 사무실 찾기에 나섰던 미국 독자 체험기를 어렵게 구했다. 하지만 그 독자 역시 끝내 정확한 위치는 찾지 못한 채 대충 할리우드 거리 어디쯤일 것이라고 추정만 하고 포기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독자가 지목했던 할리우드 거리를 직접 답사하면서 주민들에게 물었다. 돌아온 것은 "필립 말로? 레이먼드 챈들러? 그게 누구냐?"는 답뿐이었다. 거기서 문학기행은 끝났다. 'LA에 챈들러는 없고 하루키는 있다'는 아이러니한 결론만 내린 채.

현재 세계 문학계의 흐름을 고려하면 하루키가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만약 하루키가 수상 소감에서 또다시 챈들러를 언급한다면 챈들러가 하루키를 통해 부활할 수 있을까. 챈들러를 찾지 못한 문학기행을 마치면서 혼자 해본 상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