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구 광복동

- 남도 달려온 국도 2호선 종점은
- 함경북도까지 뻗은 7호선 시점
- 한자리 모으면 기막힌 포토존

# 영도다리·자갈치시장

- 47년 잠자던 다리 들어올려
- 원도심 도시재생 날갯짓
- 끝은 새 시작의 활력소

# '주경야음' 밴드

- 청년 4명 첫 번듯한 공연
- 청소업체 등 일하면서 음악
- 살아보자 함께 힘껏 살아보자

2015년 을미년(乙未年) 벽두. '을미' 씨는 두근거린다. 입이 바짝바짝 탄다. 이 계획은 엎어지면 안 된다. 되게 해야 한다.

근데 2014년 갑오년을 워낙 큰 충격과 혼란 속에 힘들게 살아낸 사람들에게 막상 부탁하려니 좀 미안하고 염치도 없는 것 같아 걱정이 많다. 을미 씨는 어렵게 입을 뗐다.

"저, 시민 여러분. 2015년을 함께 할 길동무로 '낙관주의'를 찾고 있는데요."

을미 씨의 걱정은 이거였다. 사람들 반응이 "뭐라고요? 지난해 2014년에 그 고생을 하고도 몰라요? 지금은 낙관주의를 말할 때가 아니잖아요? 낙관할 건덕지가 없는데 어디서 찾으라고!"뿐이라면 어떡하지, 새해를 어떻게 힘차게 시작하지?

그때 시민들이 답했다. "그래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같이 찾아봅시다. 거, 머시라꼬!"

을미 씨, 기뻐서 눈물을 찔끔거릴 뻔했다.

■ 부산 기질 머금은 압축파일

'거, 머시라꼬'라는 사투리에는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 있다. 비슷한 뜻의 표준어 표현 '난 또 뭐라고'는 나는 그런지 미처 몰랐다는 사실의 발견 느낌이 강하다면, 거 머시라꼬에는 상대가 쭈뼛쭈뼛 어렵게 부탁할 때 '당신의 형편이 그런가? 나도 사실 넉넉하거나 편한 처지는 아니지만 그 부탁 들어줄게. 그것 때문에 그렇게 걱정한 거야' 하는 의미가 함축돼 있을 때가 많다. 어려움 속의 낙관주의, 부산 사람 의리 같은 게 압축파일처럼 숨어 있다.

을미 씨를 처음 안내한 이는 부산 광복동에 사는 광복 씨였다. 광복 씨는 을미 씨 손을 잡고 롯데백화점 광복점 앞으로 갔다. 백화점 바로 앞 옛 시청 솔향기 쉼터 끝에 '국도 2호선 종점' 도로표지판이 서 있다. 2라는 숫자와 '종점 End'라는 글자만 있는 표지다. 전남 신안군에서 시작해 377.9㎞를 달려 부산 중구에서 끝나는 도로다.

"국토 남쪽 끝 남도를 수평으로 신 나게 달려온 국도2호선이 여기서 끝난다는 표시라. 나는 여기서 끝난다는 저 '종점 End'라는 글자를 볼 때마다 좀 짠하드만." 광복 씨가 말했다. 소설가 김동리(1913~1995)가 소설 '밀다원 시대'에서 "그들은 이 부산이 '끝의 끝' '막다른 끝'이란 것을 모른단 말인가"라고 썼던 그 느낌이 얼핏 겹친다.

"걱정마소!" 광복 씨가 을미 씨 손을 끈다. 2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 백화점 정문 앞으로 가니 '국도 7호선 시점 Begin'이라고 큼지막하게 쓴 도로표지판이 있다. 풍광이 아름다워 온 국민이 사랑하는 국도 7호선이 여기서 시작한다는 표시다. '국도 7호선. 부산광역시 중구에서 함경북도 온성군 유덕면에 이르는 일반국도. 길이는 513.4㎞이다'. 을미 씨는 눈을 씻고 다시 백과사전 설명문을 본다. 강원도에서 끝나는 줄 알았던 국도 7호선이 그 위에 있는 북한의 함경북도까지 뻗은 길이란 거다.

"여기는 시점이여. 비긴(Begin)이라고. 국도 2호선은 여기서 끝나지만, 북녘까지 수직으로 뻗어 가는 국도 7호선도 여기서 새로 시작한다는 거지. 통일로 가는 길이야. 종점이라고 걱정을 마세요. 여기 시점도 있잖아." 광복 씨, 활력이 돈다. 6·25전쟁 때 밀려 밀려 부산에 온 김동리 선생의 심사와는 확실히 다르다. '끝의 끝'이 아니다. 끝은 끝나고, 그 끝을 받아 안고서 새로 시작하는 새해 기운이 비로소 선명하다. 을미 씨, 발걸음이 가볍다.

"지자체는 뭐 하나? 국도 2호선 종점·국도 7호선 시점 도로표지판 모형을 만들어 갖꼬 한자리에 딱 모아놓으면 기막힌 포토존 하나 생길 텐데." 광복 씨, 신이 났다.

■ 죽은 듯했던 다리가 다시 일어서고

영도에 사는 영도 씨가 을미 씨를 잠깐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낮 12시. 사이렌이 울렸다. 도심에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가 울려 퍼졌다. 영도대교 근처 넓은 번화가 도로가 영화 촬영장처럼 순식간에 텅텅 비는 기적 같은 장면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어났다. 이윽고 영도다리 교각이 천천히 솟으며 도개가 시작했다.

"저 장면을 그냥 다리 꺼떡꺼떡 들어 올리는 걸로만 봐도 곤란해. 저 다리가 1934년 완공해서 1966년까지 날마다 교각을 들어올렸는데 그 뒤로 2013년까지 47년 동안 죽은 듯이 고정돼 있었거든. 그러다 새로 시작한 거라. 새로 일어서는 거라고!" 영도 씨, 열변이다.

새로 일어섬. 새로운 시작. 끝의 끝과 시작의 시작. 을미 씨가 보기에 부산이란 곳은 유난히 이런 장소와 이미지가 많다. 북쪽에서 달려온 땅이 바다에 막혀 끝나는가 싶었는데, 거기서 바다가 시작한다. 그 지점에 세계로 한국이 뻗는 항구와 국제여객선터미널이 있는 식이다. 수명이 다해가는가 싶던 여러 마을이 도시재생으로 새롭게 시작하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또 어떤가.

소설가 이병주(1921~1992)는 소설 '산하'에서 6·25 때 임시수도였던 부산을 "그렇게 해서 부산은 불안의 도시였다…. 불안과 공포가 지배하는 도시에 있어서 미학이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비관했다. 을미 씨에게서 이 말을 전해 들은 영도 씨가 말했다. "마, 됐고. 다 끝났다 싶게 어려웠던 적이 한 두 번이가. 그라믄 그래 어려웠던 거 털어내고 새로 시작한 데는 또 어데였던가 이병주 선생한테 함 물어봐라"고 반문했다.

사실, '2015 낙관주의'를 찾아 나섰던 을미 씨의 여정은 쉽지 않았다. 계속 벽에 부딪쳤다. 자갈치시장에서 주점을 하는 70대 할머니는 "눈은 침침하고 몸은 아프고 장사는 안 되고 시집갔던 딸은 이혼해서 돌아오고…힘들다"고 말했다. 20대 예술인은 "낙관주의요? 상황을 빤히 보면서 그런 걸 찾나요? 낙관할 만한 상황이 아니잖아요?"라고 반문했다.

■ 아이씨밴드 공연장에서

힘겹게 원도심 거리를 걷던 을미 씨 눈에 문득 공연포스터가 들어왔다. '아이씨밴드 공연. 제목-살아보니 살아지네. 2014년 12월 19~20일 덕천동 스트릿624 공연장'. 을미 씨는 공연장에 갔다. 부산 청년 4명이 거리공연만 줄창 하다가 처음 여는 소극장 기획공연이라고 했다.

낮에는 청소용역업체 일원으로 일하고 일 마친 뒤 노래한다는 밴드 일원 김창하(36) 씨가 말했다. "학원강사 그만두고 거리공연 나섰을 때 이렇게 번듯한 공연을 할 날이 올지 몰랐죠. 쉽지 않았지만, 잘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첫 공연 제목이 '살아보니 살아지네'예요." 아이씨밴드의 공연은 짜릿했다.

"그래! 2015년아. 살아보자. 함께 힘껏 살아보자." 을미 씨는 두근거렸다. 힘도 났다. 그래서 하늘 보며 속삭였다. "거, 머시라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