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천문화마을에 사는 장영이 할머니가 동네를 굽어보며 지난 세월 이야기를 들려준다. 할머니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지금은 마음이 참 편하다"고 말했다. 사진=강덕철 선임기자

- 전쟁통에 몰려온 태극도 사람들
- 감천고개 터잡았지

- 한 뼘 넓어진 방에서
- 공부하던 우리 아들
- 든든한 그 뒷모습
- 대기업 부장도 되고 벤처 사장도 되고
- 다 이 집 덕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네

- "사람 길 막으면 안 돼"
- 골목 사이에 두고
- 작은 네 채에 2층 올렸지

- 집이 좁았기에 가족사랑 남달랐고
- 가난했기에 나눌 줄 알았다

	가분수집을 지어 자녀들을 길러낸 감천문화마을 일감상회 이창호(오른쪽)·장세옥 씨 부부.

아미동 쪽에서 감천고개를 오르다 보면, 고개 오른쪽으로 알록달록한 건물의 계단식 마을이 펼쳐진다. 한국전쟁 통에 피란 온 태극도 믿는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형성한 '태극도 마을'이다. 감천문화마을의 원형인 셈이다.

옥녀봉 계곡 주위로 대여섯 평 태극도 판잣집들이 빽빽하게 밀집되어 가로로 골목을 만들고 세로로 까꼬막의 언덕길을 만들었다. 이렇게 마을이 형성된 이후, 한때 3만여 명이 살았던 '산복도로 피란민촌'이 바로 감천마을이다.

대부분 '방 하나 부엌 하나'인 판잣집 단칸방에서,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무렵 장성한 자녀들을 위해 '슬레이트 블록집'에 다락방을 앉힌다. 1990년대 들어 슬래브 집으로 개축하면서, 본격적으로 가분수집이 등장한다. 워낙 좁다 보니 2층을 올릴 때 적게는 한 뼘에서 많게는 서너 뼘 이상 아래층보다 더 크게 집을 올렸다. 좁은 방에서 지그재그로 웅크려 칼잠을 자야 했던 자식들이 편하게 발 뻗고 자라고, 이웃들에 폐 끼치지 않을 만큼 '허공의 몇 뼘 면적'을 자식들에게 내어주었다.

	감천문화마을 가분수집 아래로 관광객이 지나가고 있다.

감천문화마을 입구 '일감상회'에서 감천마을 지킴이 이창호(69) 장세옥(65) 씨 부부를 만났다. 이 씨는 대전 사람으로, 직장을 구하려고 부산으로 내려와 맞춤복 기술을 배웠다. 같은 공장에 다니던 아내의 친구 소개로 1970년 결혼하여 아내의 친정이 있는 감천마을에서 44년째 살고 있다. 32년간 감천마을의 통장을 맡아 오늘의 감천문화마을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 이다.

부인 장 씨는 태극도에 입교한 아버지를 따라 경북 칠곡에서 8살 때 감천마을로 온다. 사흘 분량 양식을 가지고 방 한 칸, 부엌 한 칸 집을 얻어 생활하면서, 친정아버지는 충무동을 돌며 지게를 지어 가족을 부양했다.

이 씨 부부는 3형제를 두었는데 자식들이 올바르게 자라기를 늘 소원해 왔다. 당시 '감천은 태극도촌, 아미동은 깡패촌'이라며 유별나기로 소문날 정도였다. 불량스런 아이들이나 학교 안 다니는 아이들과 어울릴까 항상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삼형제가 졸업할 때까지 초등학교 육성회 임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마음을 썼다.

2000년에 '가분수집'을 지은 것도 자녀 교육 때문이었다. "집을 지었을 때가 큰놈 고3 때였어요. 한창 공부할 때라 빚을 내 2층을 올렸지요. 1층보다 1평 정도 넓게 지었습니다. 방이 두 개였는데 큰방은 둘째와 셋째가 쓰고, 작은 방을 큰놈 공부방으로 만들어 주었죠." 부부는 가분수집을 짓고 난 뒤 자녀들이 행복해 하는 걸 보고 자신들 몸 고생은 까맣게 잊었다고 한다.

"자식들이 방에 앉아 공부하는 걸 보니 흐뭇하더군요. 가분수집 덕분인지 첫째는 부경대를 졸업한 후 사업을 해요. 둘째는 서울대 항공기계설계학과를 졸업하고 한화그룹 부장으로 재직 중이고요. 막내는 외식사업 하려고 조리사로 일합니다." 부부의 얼굴에 다사로운 미소가 함지박만 하게 번진다.

우암동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으로 반출해가는 '조선 소'의 검역 사무를 보던 '이출우검역소(移出牛檢疫所)'가 있던 자리. 해방 후 거처가 없던 일본 귀환동포들이 '소막(牛舍)'을 보금자리 삼아 들어앉았던 동네다. 한국전쟁 때 미군이 합판으로 '적기피난민수용소'를 조성해 피란민을 수용했는데, '수용소 나래비집 마을'이라 불렀다. '나래비'는 줄지어 섰다는 뜻의 일본식 표현이다.

가구당 3~5평의 공간에서 대여섯 명 식구가 엉켜 살았는데, 감천마을처럼 열 번 넘게 집수리와 증축을 반복하며 지금의 가분수집을 형성한다.

우암동 이야기를 들어보려 수용소 나래비집 마을 입구 '은하수 경로당'으로 향한다. 모두 우암동에서만 60~70년을 살아온 할머니들이다. 경로당에는 거친 세월의 풍파에도, 곱게 늙은 할머니 대여섯 분이 객식구를 반긴다. "늙으이 구질구질한 소리 뭐 들을 끼 있다꼬 이래 추운데 왔노?" "어무이들이 고생해서 잘 키운 '자식 자랑' 들을라꼬 왔다 아입니꺼~" "즈그가 저절로 잘 컸지, 우리가 키운 게 뭐 있나. 좁은 데 살면서 먹고 살기도 바빴는데…."

경로당 회장 김순금(85) 할머니가 대뜸 "우리 자슥이 '이리 좁은 집에서 여섯 명이 어떻게 살았을꼬?' 하데. 그래도 자식 넷 다 잘 키웠다 아이가"하고 지난 세월을 꺼내놓는다. "자녀는 어떻게들 되십니까?" 물으니 "다복하지. 모두 5~7남매씩은 낳았어. 단칸방에서 함께 살면서도 애는 어떻게 배고 낳았는지~" 하자 와그르르 웃음보가 터진다.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는데도 잘들 커 줬어." "학원에 보내주길 했나, 공부방을 만들어 줬나, 숙제도 큰놈은 밥상에서 하고, 작은 놈은 바닥에 배 깔고 하고~." "아침 일찍 일을 가야 하니 밤이면 '불 끄고 자자'며 타박했으니 공부나 제대로 했겠나?"

그래도 자식들 배 안 곯게 챙겨 먹이고, 장고개 너머 문현동에서 물을 길어 깨끗하게 빨아 옷 입히고, 나쁜 짓 하면 회초리로 꾸짖으며 키웠단다.

그래서인지 비가 오면 진창길이 되는 골목에서 뛰어놀고, 공중화장실에 줄을 서서 볼일 보는 생활이었지만 건강하게 잘 커 줬고, 반듯한 사회인으로 자라주었다고.

김순금 할머니는 우암동 산 아래 집을 얻어 살다가, 산사태로 집을 잃고 이웃집에 세 들었는데 "주인집 아이가 내 자슥을 심심하면 때리고 괴롭히는 기라. 마음이 아프데. 그래서 빚내고 친정 어무이가 해주는 돈으로 나래비집을 안 샀나. 그라고는 눈치 보지 말고 원 없이 뛰어 놀라 캤지" 하며 오래된 일을 생생히 들려줬다.

자녀들 근황을 물으니, 은근히 자식 자랑이다. 평양사람 김갑순(86) 할머니는 우암동에 온 지 61년째다. 막내아들은 동아대를 4년 장학생으로 졸업하여 개인 사업체를 운영하고, 막내딸은 학원원장으로 제법 큰 학원을 운영하고 있단다. 경로당 막내인 총무 박순분(79) 할머니는 경북 상주 양반집 며느리로 꼬장꼬장한 남편과의 사이에 딸 다섯을 두었다. 그중 셋째 딸은 종신서원 수녀로 봉사의 삶을 산다.

남편이 상이용사였던 이노미(88) 할머니는 1950년대 초 중앙동 40계단 뒤편 70평 적산가옥에서 살았다. 1953년 부산역전대화재 때 모든 것 다 잃고 우암동으로 들어와 지금껏 61년을 이곳에서 채소장사 등을 하며 5남매를 키웠다. 수중에 생활비가 없어 급전을 빌려 가며 다락에서 키운 자녀들이 교육 일선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일본 고베에서 태어난 신순영(81) 할머니는 11살 때 해방이 되어 부산으로 왔다. 처음에 매축지 수용소에서 살다가 매축지 화재 때 우암동 소막으로 들어왔다. 2남매를 두었는데 아들은 공장설비 회사를 운영하고 딸은 현모양처로 "가족 건사를 똑소리 나게 잘한다"고 자랑이다.

"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의 나이가 있나요~ 마음은 하나요, 느낌도 하나요, 그대만이 정말 내 사랑인데~ 눈물이 나네요~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 이제 인생의 미련도, 여한도 없는 어머니들이 유행가 '내 나이가 어때서'를 합창한다. 노인학교에서 배운 노래다. 모든 인생의 고난을 다 짊어지고 살다가,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처럼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어머니들이다. '가분수집'에서 금쪽같은 자식들 모두 독립시키고, 이제 일생의 업을 벗어버린 어머니들의 얼굴은 편안하다.

우암시장에서 밀면을 전국 최초로 시작한 '내호냉면'집을 찾았다. 유상모(66) 대표 내외가 반가이 맞는다. 내호냉면은 선대인 밀면의 창시자 유복연 옹과 정한금 여사가 우암동에 자리 잡으며 시작한 가게다. 선대 유 옹이 지은 가분수집에서 세 동생과 함께 다복하게 산 유 대표는 고인이 된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의 '가분수집 같은 사랑'이 새삼 사무치기에 그렇단다. "아버지께서는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하신 후 공무원으로 재직하셨습니다. 토목 관련 일을 하셨답니다. 평양에서 일하실 때 6.25가 터졌는데, 그때 제 나이 2살이었습니다. 아버님이 평양에서 저를 안고 흥남에 있는 가족을 찾으러 석 달을 걸어오셨답니다. 집념이 강하고 가족을 끔찍이 아끼셨던 분입니다."

유 대표는 유 옹이 유언처럼 남긴 말을 자주 곱씹는다. "우리 가게는 골목을 사이에 둔 작은 건물 네 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위에 2층을 통째로 올린 것이죠. 보통사람 같으면 건물을 한데 합해서 큰 건물을 지었을 텐데, 아버지는 '사람 다니는 길은 막는 게 아니다. 우리가 조금 불편한 게 낫다'고 하셨어요. 다섯 평 가게를 열고 쪽방에서 여섯 식구가 한데 자던 시절에도 '음식을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된다'고 하셨지요. 돌아가시기 전날 달력 뒷장에 당신의 고향 약도를 그려주시며 '통일되면 꼭 찾아가 봐라'고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유 대표는 약도를 내호냉면 벽에 걸어 놓았다. 그런 아버지가 음식하는 것이 부끄럽고 싫어서, 친구를 집에 데려오지 않았던 일이 늘 가슴에 걸린다. 그러나 내호냉면 4대 경영수업을 하는 아들 재우 씨 부부에게 유 대표는, 이미 또 다른 '가분수집 같은 사람'이다. 부모가 일군 '싸면서도 영양가가 높은 음식' 밀면에 담긴 마음을 깨우쳐 대를 이어 가업을 잇는 유 씨 부자를 보며, 가분수집의 가르침이 크고 넓음을 깨닫는다.

'부산의 마음들'이 옹골지게 수납되어 있는 공간이 가분수집이다. 이곳에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이들이 '역동적인 부산사람의 전형'이 되고, 따뜻하고 착한 성정이 '남을 배려하고 도움 주는 부산의 마음'으로 표출되는 곳. 집이 좁았기에 가족 사랑과 우애가 남달랐고, 가난하게 살았기에 나눌 줄 알고 풍족함에 감사했던 가분수집 사람들. 이들이 있었기에 부산의 오늘이 있고, 부산의 내일이 희망차다. '가분수집의 사람, 가분수집의 마음'이 새해를 시작하는 희망 부산의 필수 자양분인 것이다.

최원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