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 로비에서 '송년음악회'를 앞두고 부산시향 단원들이 '리 신차오, 우리와 함께해 주세요'라는 펼침막을 들고 서 있자 리 신차오(맨 오른쪽) 지휘자가 단원들을 다독이고 있다. 조민희 기자

- 공연서 리 신차오 편지 깜짝 낭독
- "간섭·모독…더 못할 것 같지만
- 부산시민 사랑 생각해 남을 것"

지난 19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2014 부산문화회관 송년음악회'에서 사상 유례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부산시립교향악단(부산시향) 리 신차오 수석지휘자가 이날 공연을 마친 뒤 대독 형태로 관객에게 편지를 낭독한 것이다.

박성택 부산문화회관 관장과 리 신차오 등 시립예술단 간 마찰이 끊이지 않는 데다 최근 리 신차오가 사퇴 가능성을 시사한 가운데 벌어진 일이었다.

	리 신차오

이날은 '부산문화회관 송년음악회'가 지난 18일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리는 날. 공연 전 대극장 로비에서는 첫날처럼 부산시향 단원들이 '우리는 당신의 음악을 사랑합니다. 마에스트로 리 신차오 우리와 함께 해주세요'라고 적힌 플래카드와 영어로 'No Lacrimosa('라크리모사' 안돼요)' 'Please be with us(우리와 함께해 주세요)' 등이 적힌 A3용지를 들고 있었다.

오후 7시10분까지 이런 모습이 계속되자 리 신차오가 나와 "시민을 위해 곡을 연주하자. 80분 동안 최선을 다해 공연하고 그동안 생각해보겠다"며 울먹이는 단원들을 다독여 데리고 들어갔다.

■ 돌발상황, 왜 불거졌나

이에 앞선 사정은 이랬다. 지난 15일 부산문화회관 측은 부산시향의 호른과 클라리넷 수석 결원 추가모집 실기전형을 진행했다. 리 신차오가 심사위원과의 미팅 자리에서 호른 전공 심사위원이 없으니 심사 후 의견을 나누고 적임자를 뽑도록 하는 '사후조정시간'을 요청했다. 문화회관 측은 "다른 5명의 심사위원의 권한도 있고 '사후사정'에 해당해 공정성에 흠집이 날 수 있다"며 거절했다. 화가 난 리 신차오는 실기전형에 불참했다.

급기야 다음 날 부산시 문화체육관광국장을 찾아 ▷예술적 결정 고수 어려움 ▷문화회관의 지속적인 의심 ▷명예 실추 등을 호소하고 사퇴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사태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특히 이번 공연을 앞두고 리 신차오가 계획에 없던 '라크리모사(눈물의 날)'라는 작품의 악보를 단원들에게 전달하면서 분위기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 곡은 모차르트의 '레퀴엠'에 나오는 짧은 합창곡으로, 그간 리 신차오가 부산시향을 떠날 때 앙코르곡으로 연주하겠다고 얘기해 왔다.

송년음악회가 시작되고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이 울려퍼졌다.

■ "지금 떠날 수 없습니다"

돌발상황은 관객의 기립박수와 함께 부산시향과 출연자들의 몇 차례 무대 인사가 끝난 뒤 벌어졌다.

갑자기 한 여성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무대와 관객석으로 흘러나왔다. "저(리 신차오)는 부산에 와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중략) 부산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할 정도로 부산을 사랑합니다"며 부산과 관객, 단원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어 "제가 부산에 온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시향과 함께 좋은 음악으로 관객과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 몇 개월 동안 비예술적인 간섭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심지어 이유도 모르고 인격 모독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6개월 전부터 준비했던 내년 음악계획까지 실현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지금 심정으로는 이곳에서 더는 음악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중략) 이번 곡 '라크리모사'가 지금 저의 심정과 같습니다. 지금 제 마음속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저는 관객 여러분을 영원히 사랑할 것입니다"라고 사퇴의사를 밝히는 듯했다.

리 신차오의 친구인 이 여성은 이어 "이 편지는 지휘자님이 며칠 전에 써서 저에게 읽어달라며 준 것"이라며 "방금 공연이 끝난 뒤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며칠 동안 제가 여러분께 받은 사랑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떠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전했다.

관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바로 '라크리모사'가 연주됐다. 한 관객은 "마치 짧은 드라마 한 편을 보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제야음악회 등 다음 공연 스케줄에 리 신차오가 없어 의아해 했다"며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상황 자체가 안타깝고 부끄럽다"고 말했다.

리 신차오는 음악회가 끝난 뒤 본지와 만나 "편지는 일주일 전쯤 썼다. 그때 심정은 정말 그랬다"며 "친누나 같은 친구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여전히 문제들이 계속될 것 같지만 (남기로 한 게) 잘한 결정이기를 바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