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이 가진 환영적 속성이 뭐냐고 질문하면, 흔히 많은 사람이 물질에 끊임없이 집착하게 만드는 힘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살펴볼 사실은 식민지를 약탈하거나 인간을 노예로 삼으면서 해왔던 비등가교환(가치가 대등하지 않은 것을 서로 바꾸는 일)에서부터 지금의 자본주의가 하고 있는 등가교환(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상품의 교환이나 상품과 화폐가 교환되는 일)에서 이 '가치'라는 것을 매기고 교환하는 방식을 아무 가치 없는 '화폐'에 기대어 행하는 그 과정 자체가 환영적 속성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가치'를 자신의 주체성 밖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일상의 반복을 자본주의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화폐는 그런 관점에서 이미 폭력적 억압을 환영을 통해 실현하고 있는 일종의 괴물이다. 계급적이고 차별적인 시선은 자본이라는 괴물을 통해 만들어지고, 그리하여 우리의 신체가 비교당하고, 우리의 꿈이 비교당하는 일이 너무나 손쉽게 가능해진다.
실비아 페데리치는 '캘리번과 마녀'라는 책을 통해 괴물과 마녀로 취급받아 온 사회적 타자들, 그 가운데 특히 여성에 대한 차별이 이 자본이라는 괴물이 근대를 재편성하는 과정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여성 신체의 소외과정으로 탐색할 수 있다고 본다. 마르크스가 자본에 의해 노동자의 신체가 소외된 것을 극렬하게 비판했지만, 노동자 또한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본의 힘으로 가부장제의 권력을 행사하며 그들 또한 여성의 신체를 소외시켜왔음을 저자는 유럽의 '마녀사냥'에 대한 사회적 토대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며 밝히고자 한다.
이 책을 통해 유럽 사회에서 가부장제 사회제도를 따르지 않는 여성들이 어떻게 '마녀'의 본보기가 되어왔고, 그들의 신체가 어떻게 폭력적으로 억압되어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사사롭지만 그들에겐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에서도 결혼 적령기가 지난 것으로 판단되는 여성들이 명절 밥상의 '가족'을 구성하지 않고 있는 마녀로 낙인찍히는 일상사가 반복된다.
중세의 삶에서 '노예'라는 계급적 신체에 대한 차별이 존재했다면, 저자는 "근대화 안에서 만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위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운명이라는 미명하에 노동력의 생산을 은폐하는 노동 기능으로 구성된 것이라면, '여성의 역사'는 '계급의 역사'이다"(35쪽)라고 주장하며, 여성은 이제 젠더적 차별을 넘어 계급적 차별의 기호로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고대로부터 마녀는 여성에 대한 다양한 메타포를 발산하기에, 이 책이 마녀에 대해 너무나 자본주의 쪽으로 편협하게 해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웅 '이순신'이라고 부르는 중세 한 인물이 근대적 식민사관에 의해 이미 망해가는 조선왕조의 유일한 영웅처럼 악용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다면, 이와 반대로 그동안 괴물로만 기록되었던 '마녀'들의 신체와 그들의 힘을 근대화 과정에서 쟁투하면서 '반자본주의'적 삶과 그러한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기록으로 살펴볼 지혜가 생성될 것이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