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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어진 진정한 외로움, 소설 쓰는 소중한 힘이죠"/소설가 정태규

연내 세 번째 창작집 발간, 내년 장편 집필 계획…삶의 의지 다져

안구마우스로 글자판 익히는 중…불편해도 글 쓰기 문제없어

온라인 초대석 <2> 루게릭병 투병 소설가 정태규

  • 조송현 기자 ·뉴미디어국장 pine@kookje.co.kr
  •  |   입력 : 2014-09-26 10:3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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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태규 씨가 집필계획을 밝히고 있다. 조송현 기자

얼마 전 여자프로골퍼 미셸 위와 메이저리거 류현진이 유명세를 치르듯 얼음물 세례를 받는 것을 보고, 그 행사가 루게릭병 환자를 위한 아이스버킷 챌린지란 것을 알았을 때, 한 생각이 기자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정태규 형을 만나러 가야 한다'. 그는 2012년 가을에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 2년 가까이 투병 중인 부산의 중견 소설가다. 안타깝게도 올해 초부터 병세가 급진전되고 있다 한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설가로 큰 작가로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아왔다. 그런 정 작가가 현재까지 마땅한 치료약이 없는 루게릭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개인에게는 물론 부산문단에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다. 개인적으로 고교 후배인 기자는 그가 평소 어려우면서도 살가웠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24일 오후 무거운 마음으로 부산 대연동 힐스테이트 푸르지오 아파트의 정 작가 집을 찾아갔다. 부산소설 문단의 막내인 이미욱 씨가 동행해주었다.

아파트 102동 2605호실은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문 입구에서 정 작가의 부인 백경옥 씨가 밝은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정 작가는 소파에 앉아 TV 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소파 앞으로 다가가 정 작가의 눈을 마주보며 "오랜만입니다. 견딜 만 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했다. 대답은 그의 입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는 다만 반가운 눈빛을 보였다.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가슴이 짠했다. 정 작가가 산문집 '꿈을 굽다' 머리글에서 밝힌 대로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말을 꼭 다시 듣고 싶었다.

-요즘 어떻게 소일하고 있나.

▶아침에 일어나서 마사지 하고 운동을 조금 한다. 그러고 나면 컴퓨터 앞에서 안구마우스로 글자판을 익힌다. 이게 일과 중 가장 큰 일이다.

여기까지 이야기 하는 데 5분이 넘게 걸렸다. '마사지'라 발음을 알아듣기 힘들었다. 정 작가와 자주 대화를 해본 이미욱 씨가 중간에 통역을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 그러자 부인 백 여사가 ㄱ, ㄴ, ㄷ, ㅏ, ㅓ, ㅣ 등이 적힌 글자판을 들고 와 글자 하나하나를 짚었다. 부인이 볼펜으로 글자를 쭉 짚어가다 ㅁ자에 이르자 정 작가가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응' 한다. 그는 모음 글자 ㅏ자에서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런 작업 끝에 정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단어가 '마사지'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익힌다'는 말을 알아듣는 데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안구마우스로 인터넷을 하고 있는 소설가 정태규 씨.



-안구마우스는 언제부터 사용했나. 지금 활용하는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한 달 되었다. 카톡으로 간단한 문장을 친구와 가족들에게 보내는 정도다. 인터넷에서 원하는 영화를 찾아 보기도 한다. 그런데 글자판을 익히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제대로 익히면 손으로 타자를 치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글자를 칠 수 있다. 앞으로 한 달만 더 연습하면 그렇게 될 것 같다.

그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화면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아이콘을 응시하고 눈을 깜빡이자 인터넷이 열렸다. 그리고 며칠 전에 다운로드해둔 영화 한 편을 열었다. 학창시절부터 영화광인 그는 어드벤처, 코미디 장르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요즘 그가 가장 즐기는 소일거리다.

-갑갑하거나 외롭지 않나.

▶후배, 친구들, 가족들이 수시로 찾아오니까 그렇게 외롭지는 않다. 다만 좋은 사람들과 만날 시간이 점점 준다고 생각하니 슬퍼질 때가 있다. 한 친구가 있었는데 어떤 일로 투옥되었다가 위궤양을 얻어 앓다가 출소해서 위암 판정을 받고 고신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문병을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그 친구가 이런 말을 한 게 생각난다. 죽는 게 무서운 일 만은 아니다. 그게 25년 전이니까 당시 그의 나이가 30대 초반이었다. 그 젊은 나이에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니 대단하다고 새삼 느껴진다. 지금 내 심정이 그렇다. 죽음이 그렇게 두려운 것은 아니다.

-2012년 말에 발간한 산문집 '꿈을 굽다'에 루게릭 병 진단을 받은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고 절망적이라는 심경을 밝혔던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그때는 이런 병이 왜 하필 나에게 왔는가 하고 생각하니 하늘이 원망스럽고 억울했다. 지금 내 나이가 56세다. 어찌보면 살 만큼 살았다. 그런데 나보다 더 훌륭한데도 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 얼마나 많나. 이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억울할 것도 없다. 자연 속에서 생명이 나고 병들고 죽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말하는 정 작가는 얼핏 우울하면서도 달관한 듯한 눈빛을 보였다.

-스티븐 호킹을 알고 있나. 그는 루게릭 병 발병 이후에도 절망하지 않고 42년간이나 버티며 양자중력이론 등 위대한 학문적 성과를 쌓아 왔다. 의지가 중요하지 않나.

▶알고 있다. 이 병은 일정 부분까지 진행되다가 멈추는 확률이 15%가량 된다고 들었다. 호킹도 그런 예 중의 하나다. 호흡기관의 근육은 손상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뚜렷한 목표를 가져야 겠다고 의지를 다지고 있다. 다음 달 평론집을 내고 올해 안에 첫 창작잡 '집이 있는 풍경'을 재발간할 계획이다. 또 세 번째 창장집도 준비 중인데 마지막 1편만 마무리하면 된다. 또 내년엔 장편을 쓸 생각이다.

-지금 쓰고 있는 단편은 어떤 내용인가.

▶제목은 '운수 없는 날'인데 평범한 한 회사원이 하루에 겪은 일을 그린 내용이다. 극적인 반전의 묘를 살린 구성이다.

-문단에서는 정 작가가 왜 진작 소설에 올인하지 못했나 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소설가 정태규 씨가 자신의 고향이자 작품세계의 요람인 경남 합천군 쌍백면 평구리 마을 어귀에서 선영을 바라보며 회상에 잠겨 있다. 국제신문의 기획 시리즈 '내 문학의 요람' 중 '정태규의 자굴산' 편 취재를 위해 2000년 10월 1일 기자와 함께 현장에 가서 찍은 사진이다. 국제신문 DB

정 작가의 첫 창작집 '집이 있는 풍경'은 문학계간 '창작과 비평'이 평론코너에 언급할 정도로 호평받았고, 96년 제1회 부산소설문학상을 받으며 부산문단의 대표작가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두 번째 창작집 '길 위에서'가 나오기까지는 무려 13년이 걸렸다.

▶신태범 선생이 첫 창작집을 보시고 학교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나서라고 하더라. 선생도 등단할 당시 문재로 큰 주목을 받았는데 공무원하면서 작품집 하나 못남긴 것이 한이 되어 후배에게 진심으로 충고한 말이었다. 그러나 학교를 그만두는 일은 처자식을 거느린 가장 입장에서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당시 나는 그런 용기가 없었다. 소설 쓰기에 진력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외도였다. 대학 교수 하겠다고 문학 박사과정 공부에 많은 시간과 정열을 낭비했다. 두 번째 창작집이 늦게 나온 것도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쓸데 없는 욕심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소설가와 학자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설의 질 적인 측면에서도 두 번째 창작집의 작품이 첫 번째 것들보다 좋지 않다. 박사과정 공부가 나의 문학적 감수성을 많이 망가뜨린 것 같다. 버나드 쇼가 묘비에 이런 글을 적어놨다고 한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내 심정이 꼭 그래.(웃음)

-정 작가는 여러 작품에서 '원시적 감수성으로 충만한 늑대'를 갈망하고 있다. 늑대의 은유는 무엇인가.

정 작가는 마음이 여리고 감수성이 예민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야성적인 매력이 넘치는사람이라고 문우들은 입을 모은다. 창작집의 작품에서도 이 같은 작가의 이미지가 잘 드러난다. 그는 산문집 '꿈을 굽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름지기 늑대 한 마리를 키울 일이다. 머리로써가 아니라 온 몸으로, 이 삼라만상에 깃들어 있는 우리 인생의 기미를 알아채는 저 원시적 감수성으로 충만한 늑대를 한 마리 가슴에 품을 일이다. 저 창백한 이성과 관념의 숲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은빛 늑대 한 마리를.

▶늑대는 자기 삶에서 치열하게 싸워나갈 수 있게 추동하는 힘이다. 치열하게 싸우는 이유는 자아를 찾기 위함이다. 얼핏 상반되는 개념 같지만 감수성과 야수성은 같은 것이다. 둘 다 자아를 찾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나의 경우 진정한 자아찾기는 바로 진정한 소설 쓰기다. 우리 인생의 기미를 알아채는 감수성으로 충만한 늑대를 내가 품을 때 나는 진정한 소설을 쓰게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자아를 찾는 길이다.

-정 작가는 진정한 외로움이 진정한 소설을 쓰게 한다고 말했는데, 집필 계획을 들어보니 지금이야 말로 진정한 외로움의 시간을 가진 것 아닌가.

▶그렇다. 지금이 그때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은 시간밖에 없다. 그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말하는 기능, 걷는 기능, 먹는 기능 등은 언젠가 하나씩 잃어버리겠지만 남는 것은 시간이다. 생각을 숙성시키기에 좋은 시간이다. 이제 비로소 전업작가가 되었으니 글쓰기에 매진할 수밖에 더 있겠나.(웃음) 청마 유치환 식으로 말하면, '바위'라는 시에 나타나 있듯이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며 의지를 다지고 있다.

   
소설가 정태규 씨가 후배 소설가 이미욱 씨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정 작가와 서로 진땀을 흘리며 이야기를 하다보니 세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다음에 또 놀러오겠다며 자리에 일어서자 그는 비교적 또렷한 목소리로 '반갑고, 고맙다'고 했다. 문밖을 나와 엘리베이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옆에 선 이미욱 씨가 말했다. 문병왔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이 여기 서면 한결같이 말이 없데요. 다들 가슴이 먹먹했나 보다. 다만 기자는 그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 작가는 이제부터 진정한 소설을 오래 오래 쓸 것 같다는.



◇소설가 정태규 프로필

▷1958년 경남 합천 출생 ▷진주고, 부산대 사대 국어교육학과, 동대학원 국문학과 석사, 박사과정 졸업 ▷199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1996년 제1회 부산소설문학상 수상 ▷창작집 '집이 있는 풍경', '길 위에서' ▷2008년 이주홍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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