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여자프로골퍼 미셸 위와 메이저리거 류현진이 유명세를 치르듯 얼음물 세례를 받는 것을 보고, 그 행사가 루게릭병 환자를 위한 아이스버킷 챌린지란 것을 알았을 때, 한 생각이 기자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정태규 형을 만나러 가야 한다'. 그는 2012년 가을에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 2년 가까이 투병 중인 부산의 중견 소설가다. 안타깝게도 올해 초부터 병세가 급진전되고 있다 한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설가로 큰 작가로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아왔다. 그런 정 작가가 현재까지 마땅한 치료약이 없는 루게릭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개인에게는 물론 부산문단에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다. 개인적으로 고교 후배인 기자는 그가 평소 어려우면서도 살가웠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24일 오후 무거운 마음으로 부산 대연동 힐스테이트 푸르지오 아파트의 정 작가 집을 찾아갔다. 부산소설 문단의 막내인 이미욱 씨가 동행해주었다.
아파트 102동 2605호실은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문 입구에서 정 작가의 부인 백경옥 씨가 밝은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정 작가는 소파에 앉아 TV 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소파 앞으로 다가가 정 작가의 눈을 마주보며 "오랜만입니다. 견딜 만 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했다. 대답은 그의 입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는 다만 반가운 눈빛을 보였다.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가슴이 짠했다. 정 작가가 산문집 '꿈을 굽다' 머리글에서 밝힌 대로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말을 꼭 다시 듣고 싶었다.
-요즘 어떻게 소일하고 있나.
▶아침에 일어나서 마사지 하고 운동을 조금 한다. 그러고 나면 컴퓨터 앞에서 안구마우스로 글자판을 익힌다. 이게 일과 중 가장 큰 일이다.
여기까지 이야기 하는 데 5분이 넘게 걸렸다. '마사지'라 발음을 알아듣기 힘들었다. 정 작가와 자주 대화를 해본 이미욱 씨가 중간에 통역을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 그러자 부인 백 여사가 ㄱ, ㄴ, ㄷ, ㅏ, ㅓ, ㅣ 등이 적힌 글자판을 들고 와 글자 하나하나를 짚었다. 부인이 볼펜으로 글자를 쭉 짚어가다 ㅁ자에 이르자 정 작가가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응' 한다. 그는 모음 글자 ㅏ자에서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런 작업 끝에 정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단어가 '마사지'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익힌다'는 말을 알아듣는 데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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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구마우스로 인터넷을 하고 있는 소설가 정태규 씨. |
-안구마우스는 언제부터 사용했나. 지금 활용하는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한 달 되었다. 카톡으로 간단한 문장을 친구와 가족들에게 보내는 정도다. 인터넷에서 원하는 영화를 찾아 보기도 한다. 그런데 글자판을 익히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제대로 익히면 손으로 타자를 치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글자를 칠 수 있다. 앞으로 한 달만 더 연습하면 그렇게 될 것 같다.
그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화면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아이콘을 응시하고 눈을 깜빡이자 인터넷이 열렸다. 그리고 며칠 전에 다운로드해둔 영화 한 편을 열었다. 학창시절부터 영화광인 그는 어드벤처, 코미디 장르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요즘 그가 가장 즐기는 소일거리다.
-갑갑하거나 외롭지 않나.
▶후배, 친구들, 가족들이 수시로 찾아오니까 그렇게 외롭지는 않다. 다만 좋은 사람들과 만날 시간이 점점 준다고 생각하니 슬퍼질 때가 있다. 한 친구가 있었는데 어떤 일로 투옥되었다가 위궤양을 얻어 앓다가 출소해서 위암 판정을 받고 고신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문병을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그 친구가 이런 말을 한 게 생각난다. 죽는 게 무서운 일 만은 아니다. 그게 25년 전이니까 당시 그의 나이가 30대 초반이었다. 그 젊은 나이에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니 대단하다고 새삼 느껴진다. 지금 내 심정이 그렇다. 죽음이 그렇게 두려운 것은 아니다.
-2012년 말에 발간한 산문집 '꿈을 굽다'에 루게릭 병 진단을 받은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고 절망적이라는 심경을 밝혔던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그때는 이런 병이 왜 하필 나에게 왔는가 하고 생각하니 하늘이 원망스럽고 억울했다. 지금 내 나이가 56세다. 어찌보면 살 만큼 살았다. 그런데 나보다 더 훌륭한데도 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 얼마나 많나. 이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억울할 것도 없다. 자연 속에서 생명이 나고 병들고 죽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말하는 정 작가는 얼핏 우울하면서도 달관한 듯한 눈빛을 보였다.
-스티븐 호킹을 알고 있나. 그는 루게릭 병 발병 이후에도 절망하지 않고 42년간이나 버티며 양자중력이론 등 위대한 학문적 성과를 쌓아 왔다. 의지가 중요하지 않나.
▶알고 있다. 이 병은 일정 부분까지 진행되다가 멈추는 확률이 15%가량 된다고 들었다. 호킹도 그런 예 중의 하나다. 호흡기관의 근육은 손상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뚜렷한 목표를 가져야 겠다고 의지를 다지고 있다. 다음 달 평론집을 내고 올해 안에 첫 창작잡 '집이 있는 풍경'을 재발간할 계획이다. 또 세 번째 창장집도 준비 중인데 마지막 1편만 마무리하면 된다. 또 내년엔 장편을 쓸 생각이다.
-지금 쓰고 있는 단편은 어떤 내용인가.
▶제목은 '운수 없는 날'인데 평범한 한 회사원이 하루에 겪은 일을 그린 내용이다. 극적인 반전의 묘를 살린 구성이다.
-문단에서는 정 작가가 왜 진작 소설에 올인하지 못했나 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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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정태규 씨가 후배 소설가 이미욱 씨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