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바탕의 커다란 캔버스 위에 짧고 간략하게 쓰윽 붓질을 몇 번한 이우환의 '조응' 시리즈에 많은 미술애호가가 열광하고 있다.

그들은 정말로 작품에 공감하는 것일까, 아니면 품격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작가의 심오한 철학적 사유를 이해하는 척 하는 것일까.

톰 울프는 이렇듯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미술에 관한 진정성이 결여된 맹목적인 추종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출생한 작가는 예일대학에서 미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기자로 활동했다.

1975년 출판된 이 책에서 저자는 작품 자체보다는 그럴싸하게 포장한 미술이론에 의해 가치가 결정되는 현대미술은 이미 상실되었다고 말한다.

상식적으로는 작품이 완성된 후 이해를 돕기 위해 평론이 이뤄지나, 현대미술은 이론의 틀에 맞춘 작품을 제작해 시장가치가 높은 예술작품으로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론을 모르고서는 작품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 이상 '보는 것이 곧 아는 것'이 아니고 '아는 것이 곧 보는 것'이야! 왜냐하면 '현대미술은 완전히 문예적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그림이나 다른 작품은 오직 문의(文意)를 예시하기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12쪽)

"색다른 표현에 열광하는 이론가들 틈에서 심지어 잭슨 폴록이나 윌렘 드 쿠닝의 작품도, 그때의 이론만큼 대담하고 자신감 넘치는 기념비가 되지 못했다. 작품들은 '조연'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론들은 '멋있었다'." (55쪽)

톰 울프는 심지어 30년 뒤 미국미술회고전이 열리면 작품이 아닌 이론가들의 대단한 이론들이 전시장에 걸리고, 작게 복사된 작품들은 마치 캡션처럼 부착될 것이라고 조롱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예견은 빗나갔지만, 유감스럽게도 현대에도 작가들은 이론가들 덕분에 자신들의 작품이 뜻하지 않게 고가의 상품으로 대접받는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론으로 중무장한 난해한 작품 앞에서 관람객이 자유로운 상상을 통해 작품에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톰 울프는 우리가 낯선 전시장을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관람해도 되는 이유를 명쾌하게 알려준다. 이론은 그들만의 이론이며 작품 감상은 이론으로부터 자유로운 관람객 스스로의 몫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된 싸이 톰블리의 유명한 '레다와 백조'에 레다와 백조는 온데간데 없고 낙서만 되어 있다고 당황할 필요가 이제 없어졌다. 백조로 변해 제우스의 사랑을 처절하게 받아들이는 가련하고 아름다운 레다를 우리는 이미 보고 있기 때문이다.

갤러리 이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