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카메론은 '아바타'라는 첨단 영화에서 수정주의 서부극 같은 고전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면서 가상현실에 대한 은밀한 암시들을 감추어놓았다. 사진은 '아바타'의 한 장면.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2009)는 '3D 영화'라는 기술적 혁신으로 관객의 눈앞에 신세계를 펼쳐 보였다. 평면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입체 영상은 외계의 자연이라는 환상적 배경을 생생한 현실처럼 선보였으며, 경이로운 수준으로 발전한 컴퓨터 그래픽, 배우의 세세한 표정까지 포착해 옮기는 이-모션 캡처(e-motion capture)는 이전 영화의 가상현실과 디지털 캐릭터의 어색함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자칭 '세상의 왕'(King of the World) 제임스 카메론은 '터미네이터2'(1991)와 '타이타닉'(1997)에 이어 영화 기술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흥미로운 점은 '아바타'가 첨단 테크놀러지로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역설적으로 고전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철학자 김용석은 '아바타'의 장르적 특성을 '코스믹 웨스턴'(cosmic western)으로 규정했다. 젊은 남성이 원주민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영적인 각성에 이르면서 원주민 편에 서서 싸우게 되는 이야기는 '늑대와 춤을'(1990)이나 '라스트 모히칸'(1992)과 같은 수정주의 서부극 영화에서 익히 보아온 전형적인 서사이다. 미래로 무대를 옮겼을 뿐 백인에 맞서 싸운 인디언과 그들에 동화된 선각자의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다. 감독은 어떤 이유에서 이처럼 전혀 새로울 것 없는 모티브를 선택했을까?

■껍데기 속의 영혼-접속하기

'아바타'의 주인공인 제이크가 인간(군인)에서 외계종족 나비의 구성원으로 동화되는 과정은 백인 정복자에서 원주민의 일원으로 넘어가는 수정주의 서부극의 주인공과 다르지 않다. 그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요령 등 생존의 기예(技藝)를 배우며 판도라 행성의 삶에 적응해나간다.

'아바타'의 라이트모티브(leitmotiv)는 '변신'이다. 훈련과 교육의 과정이 제이크의 정체성(identity) 변화, 즉 '변신'에 그럴듯한 설득력과 몰입감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아바타'는 고전적인 플롯을 차용해 변신의 모티브에 강조점을 찍는다.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은 두 개의 공간학적 지형도로 나누어진다. 자원 채굴을 위해 주둔한 인간들의 기지촌과 이를 둘러싼 나비족의 숲으로, 인간이 나비족의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정신과 비어있는 몸에 연결(link)해 조종하는 아바타가 필요하다. '껍데기 속의 영혼'(Ghost in the shell) 혹은 다른 몸에 빙의한 귀신 이야기. '아바타'의 철학적 상상력은 기본적으로 정신과 육체를 이원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본 데카르트의 발상과 흡사하다. 제이크 설리의 변신은 낡은 육체의 회복이나 변형이 아닌 기계를 매개로 한 다른 신체, 새로운 세계의 접속(access)으로 이뤄진다.

■판도라의 자연, 사이버 공간 은유

극 중 그레이스 박사는 판도라의 생태계를 다음처럼 설명한다. "나무의 뿌리가 전기화학적으로 소통해요. 인간 신경세포의 시냅스처럼요. 인간의 두뇌보다 더 촘촘해요. 일종의 글로벌 네트워크라고요. 나비족들은 그걸 이용해 데이터와 메모리를 주고받을 수 있어요."

이 대목에서 제임스 카메론은 영화가 상징하는 바를 직접 드러낸다. 전자와 빛이 흘러다니며 기호언어를 퍼뜨리는 고도의 정보전달 체계, 기술유기체적 소통의 네트워크. 판도라의 자연환경은 정보화 시대의 사이버 공간(cyber space)에 대한 생태주의적 은유인 셈이다. 접촉하면 빛을 발하며 전기신호를 퍼뜨리는 온갖 식물들과 나비족 선조의 기억과 목소리를 저장해 후대에 전하는 영혼의 나무 등을 통해 카메론은 인터넷 가상현실에 대한 은밀한 암시들을 영화 속에 감추어놓는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제이크 설리의 변신도 새로운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이버 공간으로의 로그인(log-in)과 로그아웃(log-out). 장애로 부자유스러웠던 제이크는 아바타 속에 들어가서야 자유를 만끽하며 행복해한다. 아바타 신체를 하고 판도라의 자연에 속해 있는 한, 제이크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 처지가 아닌 이크란을 타고 날아다니며 부족을 이끄는 영웅으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본래의 몸(물리적 신체)을 치료하길 포기하고 아예 아바타(디지털 신체)를 자신의 진정한 신체(body)로 받아들인다. (온라인 게임의 유저들이 보여주듯)실재의 사막보다는 달콤한 환상을 택할지니, 현실에서 이루지 못했던 욕구와 정체성의 결핍을 가상현실 속에서 충족하며 가상과 현실의 위상이 뒤집히게 된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표현한 자연의 화사함이 실사 촬영분의 칙칙함과 대조되는 영화의 미술 설계나 3D 영상의 생생한 입체감은 이런 현실과 가상의 존재론적 역전을 납득시키기 위한 장치가 된다. 실재(real)보다 더욱 강렬한 현실감(reality)으로 보는 이의 시선과 관심을 끌어들이는 '아바타'의 하이퍼 리얼리즘(hyperrealism)은 사이버 공간이 이미 우리의 살림을 구성하는 일종의 생태가 되었으며 가상과 실재의 구분이 상당부분 무의미해졌음을 체감케 한다.

■'가상현실'을 넘어 '실효현실'로

20세기 철학의 이단아 파이어아벤트는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를 편협하게 만드는 추상적 개념의 예로 '현실'(reality)을 들었다. '이것이 유일한 현실'이라는 강고한 믿음이 삶의 틈새에 깃든 다양한 차원의 '현실들'에 눈감게 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가상과 현실이라는 속 편한 이분법으로 재단하기에는 이미 우리는 너무나도 다층적인, 여러 차원의 현실이 혼재된 삶을 살고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보급으로 대변되는 디지털 문명의 발전이 물리적 삶의 층위에 겹쳐진 다른 '현실들'을 빚어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의 활동은 이미 새로운 형태의 인간관계와 소통의 방식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온라인 금융서비스가 보편화하면서 화폐는 손에 잡히는 물질이 아닌 전자 기호가 되었다. 또한, 온라인 게임의 이용자들은 자신의 아바타를 키우며 삶의 보람을 얻고 기뻐하며, 컴퓨터 그래픽 기술은 감쪽같이 현실의 단면들을 복사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미 가상과 현실의 공존이라는 SF적 상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흔히 '가상현실'로 번역되는 버추얼 스페이스(virtual space)의 어원을 따져보면 '가상'이 아닌 '실효'(virtue)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건 사뭇 의미심장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일한 '현실'만을 고집하는 이분법의 견고함이 아니라, 디지털 기술이 만들어내는 여러 차원의 '현실들'이 인간의 존재와 의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탐구하며 실용적으로 살아내려는 유연함이다. 첨단의 테크놀러지가 환상의 영역을 현실로 끌어들이고, 반대로 현실이 꿈과 같이 모호해지는 가운데, '아바타'는 관객에게 어떻게 복합의 '현실들' 사이를 살아낼지 묻는다.


# 제임스 카메론과 3D

제임스 카메론이 3D 영화에 관심을 두게 된 시점은 1992년이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테마공원 조성에 필요한 3D 영상물 제작을 제안받은 카메론은 '터미네이터2'의 외전(外傳) 격인 단편 'T2-3D'를 만든다. '타이타닉' 프로젝트를 마무리한 카메론은 본격적으로 디지털 영화에 걸맞은 3D 영상 기술 개발에 돌입하게 된다.

두 편의 해양 3D 다큐멘터리 '심해의 유령들'(2003)과 '에일리언 인 더 딥'(2005)을 만들었고 여기서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아바타'를 만든다. '타이타닉'에서 '아바타'에 이르기까지 12년의 공백을 영화기술 혁신을 위한 연구에 고스란히 바쳤다.

조재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