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실에 눈감는 무지가 지배하는

- 너무나 '비현실적인 현실'에서

- '자동인형'처럼 살아가는 우리

- 거대 권력 '빅 브라더' 감시 속

- 훈련된 정신·규율 벗어던지고

- 자유를 향해 탈출할 수 있을까

나는 '9·11 테러' 이듬해인 2002년 초 미국인 친구 한 명과 함께 처음 미국을 방문했다. 때가 때인 만큼 어딜 가나 삼엄한 경계와 검문검색이 이뤄졌다. 실탄이 장전된 총을 들고 지시하는 공권력에 미국인들은 아주 협조적이었다. 아니, '협조'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사불란한 질서유지가 몸에 밴 듯했다. 우리는 2월 어느 날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스키 경기장을 찾았다. 수천 명 관중이 두 시간 넘게 줄을 서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검색을 받고 입장했다. 관중은 대체로 조용히 경기를 관람했다. 그러다 간간이 들려오는 짤막한 멜로디와 함께 나타나는 전광판의 '고함 질러'(Make Noise!) 구호를 따라 일제히 열광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회적 규율을 내면화하고 질서정연한 가운데 자유를 누리는 이런 모습을 선진 사회로 높이 산다. 그러나 당시 내 느낌은 미국 사회 전체가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공장이고, 사람이 '자동인형' 같다는 것이었다. 차량엔 어김없이 성조기가 나부끼고 '뭉치면 산다'(United We Stand) 스티커가 붙었다. 미국은 분명 여러 얼굴을 갖고 있지만, 이런 면모는 내가 상상하던 그 '자유의 땅'(land of freedom)이 아니었다. 

■'자유'는 우리를 진정 자유롭게 하나

'자유'란 대체 뭔가? 근대적 자유의 의미는 '자연의 제약으로부터의 자유'다. 근대 학문은 자연을 해부하고 보편타당한 법칙을 수립한다. 이를 바탕으로 예측 불가능의 자연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어 질병이나 재난에 대처했다. 자연은 오랫동안 미개인이 신봉했던 '알 수 없는'(不可知) 것이 아니라, '아직 모르는'(未知) 대상일 따름이다. 따라서 인류는 자연을 정복하고 개척하고 관리해야 한다.

이런 사고는 이성·정신·합리·논리·계획·질서·수량 따위를 '과학'으로 높이 사는 반면, 감성·몸·비합리·비논리·무계획·무질서·질 따위는 '자연'으로 강등한다. 근대 지식을 이루는 전자가 발전적 미래의 약속이라면, 후자는 퇴행과 후진의 표상이다. 여기서 '차이'(非)와 '결여'(無)의 딱지는 표준화할 수 없어 이해하기 어렵고 유통하기 곤란하다는 관리 효율성에 기댄 판단일 뿐이다.

일상에서도 규칙·계획적 생활을 강조한다. 훈련된 정신과 이성적 규율로 관리되는 몸이 바로 근대적 신체다. 이를테면 국가적 디자인에 맞춰, 새벽종이 울리면 빗자루 들고 나가 청소하고 질서정연하게 줄맞춰 행한 국민체조가 대표적이다. 규율을 이해하고 순응하면 자유롭지만, 오해하고 불응하면 감옥이다. 조금 더 발전하여, 법을 알면 자유롭게 어기거나 바꿔버릴 수 있지만, 모르면 가진 것도 강탈당한다. '지식이 곧 권력'(knowledge is power)이다. 이렇게 인간적 자유의 경계에서 자연은 정복되거나 초라하게 밀려나고 있다. 

■모순과 예외를 정상으로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1903~1950)이 1949년 발표한 소설 '1984년'(Nineteen Eighty-Four)은 관료화한 근대 시스템의 거침없는 방향성의 민낯을 보여준다. 작품은 사람들이 인간적인 품성까지 잃고 영혼 없는 존재가 되지만, 그런 사실을 각성하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거대권력 혹은 지배질서인 빅 브라더(Big Brother)는 낱낱이 쪼개진 개인들을 대표하는 국가(권력)의 자유를 완벽하게 성취하고, 마침내 다음과 같은 슬로건을 외친다.

"전쟁은 평화(WAR IS PEACE) 자유는 예속(FREEDOM IS SLAVERY) 무지는 힘(IGNORANCE IS STRENGTH)"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다면, 제정신이다. 반대로 이것을 현실이라 여긴다면, 비현실적인 사람이다. 아마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대부분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독자는 이를 모순이라고 생각하며 인간이 되기 위해 애쓰는 주인공 윈스턴(Winston)을 제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오웰의 근본적인 물음은 '정작 우리가 그런 상태에 살고 있지 않은가'이다.

이미 상식이 된 '전쟁이 곧 평화'라는 현실론 속에서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자발적으로 제한한다면, 제정신일까, 비현실적일까? 또한, 같은 맥락에서 그런 파괴의 정치적·심리적·도덕적인 영향과 결과를 지적하는 윈스턴들을 현실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진실에 눈 감는 무지가 현실을 지배하는 '비현실적인 현실'에서 우리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유로부터 도피'한다. 에리히 프롬은 이런 사회를 '자동인형들의 사회'(a society of automatons)라고 말한다.

윈스턴은 이 같은 모순과 예외의 정상화가 사람의 '이중사고'(doublethink)로 가능해진다고 설명한다. 지난해 에드워드 스노든이라는 또 한 명의 윈스턴은 미국의 빅 브라더 기획과 활동을 폭로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것을 말하면 보통 심각하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리려" 한다면서, "더 많이 말할수록 더 많이 무시당하고 '그건 문제가 아니야'란 말을 더 많이 듣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미국만의 일일까?

■자유를 향한 탈출은 가능한가? 

체계의 안정과 질서는 차이와 어깃장 같은 인간적인 요소로 생성되는 고민과 갈등의 싹을 없앤다. 우리는 제도 교육과 광고 문화에 따라 언제나 정답이 알기 쉽게 머릿속으로 쏙쏙 들어오기를 바라도록 훈련된다. 또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 이해하려고 고민할 필요 없고, 회의와 사색 과정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

그래서 체계 없고 불확실하며 감정적인 '너'와 '나'의 대화는 한없이 사소해진다. 만나는 '너'들은 항상 차이를 만들어내고 문제를 복잡하게 꼬아놓기 때문에 어렵다. 그래서 '나'는 '너'들을 견딜 수 없고 또 대화하기 귀찮다. 왜? '나'에겐 늘 공기를 타고 와서 달콤하면서도 준엄하게 속삭이는 얼굴 없는 '그(것)', 빅 브라더가 있으니까. '나'와 '너'는 그(것)라는 동일성(identity)을 받아들이고, 그(것)가 모든 '나'와 '너'를 지배한다.

경계의 인문학은 거대 흐름에 휩쓸려 다니도록 유도하는 얼굴 없는 그(것)의 세계, 그 경계에서 차이를 통해 불확실을 생성함으로써 자기 얼굴의 윤곽을 드러낸다. 그리고 '너'와 '나'를 세우는 대화에 주목하고 보편적으로 교환할 수 없는 그 사용 가능성을 탐색한다.

# 자유를 향한 외로운 행보, 스페인 내전 참전 경험도

■ '1984년'의 작가 조지 오웰

'동물농장'과 '1984년' 등 작품을 남긴 조지 오웰(사진·1903~1950)은 사회주의 혁명이 던져준 희망과 그것이 보여준 절망 사이에서 홀로 선 작가로 유명하다. 1950년대 미국 국무부 해외정보국의 지원으로 그의 작품들이 한국을 비롯한 30여 나라에 번역 보급되면서 반공작가로 홍보되기도 했다. 그런데 자신의 근대 전체주의 비판의 급진성 탓에 실제로 그는 좌·우파 모두로부터 따돌림받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살았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버마(현 미얀마) 주둔 식민지 경찰 관료로 생활했다. 제국주의의 착취와 식민지 엘리트들의 노예적 속물근성에 환멸을 느낀('버마 시절'·1934) 그는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글쓰기 작업 중 몇 개월씩 부랑자로 유럽('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1933)을 전전했다.

프리랜서로 참전한 경험을 담은 '카탈로니아 찬가'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스페인 내전에 관한 보도나 사료들을 반박하는 중요한 기록으로 남아 있고, 이후 스페인 내전을 재현하는 영화나 소설에 많은 영감을 불어넣었다.

배윤기 부산참여연대 부설 리더십교육센터 소장

※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격주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