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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1575~1641)은 비록 폭군의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지만,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차츰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명에서 청으로 동아시아의 중심이 바뀌는 격변 속에서 중립을 지키는 실리 외교를 펼쳤고 대동법의 시범적 실시로 농민의 부담을 줄이는 등 조선의 재건에 진력했던 임금의 면모는 이제까지 그에게 덧씌워졌던 오명을 씻어냈다.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는 이러한 역사적 재평가와 흐름을 같이 하는 영화이다.

당대의 위정자가 대역을 내세워 자신의 부재를 감춘다는 설정은 익숙한 소재이다.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1940)에서는 유대인 이발사가 똑 닮은 외모로 히틀러와 뒤바뀌고,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게무샤'(1980)는 저격당한 영주의 죽음을 감추기 위해 우연히 생김새가 닮은 도둑을 이용한다. '광해, 왕이 된 남자' 역시 같은 플롯을 공유한다. 광해군이 의식을 잃고 궁궐을 비운 보름 동안 그를 닮은 만담꾼 하선이 용포를 대신 입고 왕의 위급을 감춘다.

■'광해'의 메시아주의

'광해'가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요인은 사극의 외양을 하고는 있지만, 근본적으론 영웅서사라는 데 있다. 보통 사람이 힘을 가지게 되면서 자신의 역할을 깨닫고 홍익(弘益)을 위해 활약한다는 점에서 '광해'는 다분히 영웅서사의 전형성을 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영화가 제시하는 영웅이 지극히 '정치적인' 영웅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서 영화는 정치로부터 구원을 찾는 우리 시대 대중의 무의식적 욕망을 반영한다.

불안한 정치적 입지 속에서 국정을 운영해야 했던 광해군의 실제 인간상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기어이 하선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광해군을 대신하게 한다. 역사에선 광해군이 추진했던 정책들이 영화에서는 광해가 몸을 피해 없는 사이 하선이 해결한 것으로 처리된다. 과감하게 민생 현안을 챙기고 주변 인물들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가짜 광해 하선. 그런 그를 영화 속 인물들은 흠모와 경외의 대상으로 받들게 된다.

이런 각색 또는 윤색을 살펴보면 영화가 담고 있는 정치적 관점이 드러난다. 정치 지도자를 바꾸는 데서 대안을 찾는 태도. '시대를 한 몸에 응집한 역사적 개인'(야코브 부르크하르트 '세계사에 대한 고찰')의 등장에서 시대의 궁지를 돌파할 출구를 보고 전적으로 그의 결정에 개인의 모든 판단과 권리를 의탁하는 신앙적 행태. '광해'의 정치관은 다분히 '메시아주의'(Messianism)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진정한 대안인가? 이것을 온당한 태도라고 할 수 있을까?

■메시아주의의 함정

이상적 지도자의 출현에 관한 갈망과 숭배라는 점에서 전근대 사회의 정치관은 메시아주의와 통한다. 임금이 하늘의 뜻을 대행한다는 명목으로 권위를 행세하던 시대의 백성은 명령에 순응하는 '수동적-타율적' 객체이자 집단적 신체로서 행동했다. '광해'에서 백성은 단지 선정의 혜택을 입는 대상으로만 나타난다. 메시아의 도래를 간절히 바라지만 거기에서 그칠 뿐 자신들이 처한 당대 사회의 부조리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대항사유를 품지 못한다.

반면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헌법 제1조 1항)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와서는 '능동적-자율적' 신체를 지닌 개개인의 창의성이 더욱 중시된다. 독재와 같은 전체주의적 리더십이 흔히 선진적 근대화의 표상으로 내세워지지만, 실상은 반대로 '자아'와 '시민(市民)'의 등장, 집단에 대한 개인의 분화(分化)가 근대 시민사회의 혁명과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다. 비록 사극이지만 '광해'가 메시아적 존재와 이를 열망하는 군중을 내세운다는 건 한국 사회가 아직 '근대적 개인-시민'의 자질을 함양하지 못한 징후인지도 모른다.

더욱 치명적인 문제는 정치 지도자를 구세주의 위상으로 받드는 메시아주의가 권력의 사인화(私人化)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광해'에서 하선의 정치는 선정(善政)이긴 하지만, 중신들의 의견이나 법질서를 아랑곳하지 않는 독재적 행태로 일관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사월이의 죽음에 격분한 하선이 의금부에 명령해 죄인을 심문하는 대목에 이르면 우리는 한 사람의 성군(聖君)이 순식간에 철권(鐵拳)을 휘두르는 폭군으로 돌변할 위험성을 보게 된다.

'광해'의 정치관은 양날의 칼이다.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펼치는 지도자상을 그린다는 점에서는 민본주의(民本主義)를 내세우나, 한 정치 지도자의 일방적인 통치를 암묵적으로 승인한다는 면에선 민주주의 원리에 역행한다. '광해'의 1000만 관객 성취를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이들은 하선에게서 민중적 지도자의 초상을 보겠지만, 또 어떤 이들은 카리스마적 독재자의 재림을 본다. 메시아주의가 보여주는 야누스의 두 얼굴이다.

정치가 신뢰를 잃고 사회가 부패하면 대중은 구원자의 등장을 갈망한다. 하지만 손쉽게 정치 지도자에게 의존하려는 유혹은 자유의 포기와 권력에 대한 무비판적 종속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견제와 비판을 포기하고 모든 권한과 판단을 떠넘기는 태도는 민주주의 정치의 포기이며 '시민' 스스로를 '백성'의 위치로 전락시킬 위험성을 내포한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국민(demo)이 스스로를 다스리는(kratos) 정치 체제 아닌가.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정치와 지도자상을 스스로 노력으로 조형해내는 새로운 정치기획일 것이다.


# 영화와 역사의 차이

- 중전·허균 빼고 모두 가공인물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역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픽션을 가미한 가상 역사물이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면서도 영화 흐름은 역사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일단 등장인물을 살펴보면 광해군과 중전 유 씨, 허균을 제외하면 모두 가공인물이다. 하선이란 실존 인물의 이름이 기록에 나오기는 하지만 천민이 아닌 양반 출신이었으며, 광해군의 대역이라는 설정 또한 영화적 허구이다. 영화에선 광해군과 중전의 사이가 원만치 못했던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둘 사이에 폐세자 이질(1598~1623)이 있었다.

광해군이 남긴 업적으로 언급되는 대동법과 호패법은 그의 재위 시기 첫해와 그 이듬해에 이미 시행되고 있었다. 1618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이뤄지는 사르후 파병은 영화에서는 이보다 3년 앞선 1615년의 일로 각색됐다.

조재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