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GV 무비꼴라쥬 제공

왕가위(왕자웨이)는 '일대종사'(2013)에서 영춘권의 고수 엽문(1893~1972)을 다룬다. 견자단 주연의 '엽문'(2008)이 먼저 공개되면서 그가 외세에 맞선 민족주의 영웅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는 그리 영웅적인 삶을 산 인물이 아니다. 이소룡의 스승이자 절권도의 탄생에 큰 영향을 끼쳤던 위대한 무술가의 삶은 사실 시대의 혼란 가운데 내던져진 평범한 소시민에 가깝다.

청나라의 멸망과 일제의 침략, 국민당과 공산당 간 내전 등 엽문의 생애는 중국 근현대사의 파란 가운데 있었다. 조상 전래의 집과 재산을 잃은 엽문은 국민당의 경찰로 일하다 내전이 종식되자 공산당을 피해 홍콩으로 이주한다. 중국 본토를 떠나 홍콩으로 발길을 옮긴 망향인. 이러한 엽문의 인생행로에서 감독은 홍콩 역사를 보았을 것이다. '일대종사'는 정주할 곳을 잃고 헤매다 낯선 타지에 뿌리내린 이민자라는 관점에서 엽문과 주변 인물들을 바라본다.

■멜로 드라마로서의 무협

무협 영화의 서사를 멜로 드라마로 재해석했던 '동사서독'(1994)처럼 '일대종사'에서도 안타깝게 이뤄지지 못하는 연인 관계가 그려진다. 팔괘장의 달인으로 엽문과 맞수인 '궁이'이라는 인물이 그러하다. 겨룸을 통해 서로의 실력을 인정한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맞수 이상의 내밀한 연정을 키운다. '일대종사'의 이야기는 엽문과 궁이가 처음 만난 1936년 시작해 연락이 끊기는 1940년대 일제강점기와 국공내전을 거쳐, 홍콩에서 재회하는 1950년대로 이어지는 인연의 선을 따라간다.

궁이는 허구의 인물이다. 엽문과의 관계, 친일파로 변절해 아버지를 해친 마삼에 대한 복수도 지어낸 이야기다. 그럼에도 왕가위는 '일대종사'에서 궁이의 인생역정에 영화의 절반 가까운 분량과 비중을 할애한다. 왕가위는 무엇을 관객에게 전하려 했을까?

■물의 이미지, 상반된 시간성

'일대종사'는 빈번하게 물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흐르는 물처럼 시간 역시 '흐른다'는 표현을 쓰듯, 우리는 영화 속 물의 이미지가 시간성에 관한 은유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재미있는 건 엽문과 궁이가 등장하는 순간마다 물의 이미지가 다른 형태로 변형된다는 점이다.

궁이는 아버지의 장례식과 마삼과의 대결 장면에서 배경에 깔린 눈과 얼음, 깨어지는 고드름 등으로 물의 이미지에 연관된다. 고체화한 물의 이미지로 흐름의 작용을 멈춘 눈과 얼음은 과거 시점에 고정된 궁이란 인물의 성격을 형상화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복수에 집착한 나머지 미래의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홍콩으로 건너온 뒤에는 가장 행복했던 젊은 시절이었던 중국 본토에서의 추억을 회상하며 쓸쓸히 죽어간다.

'멈추어라, 그대는 너무나 아름답구나!' 하던 파우스트의 외침이 가르쳐주듯이 추억과 원한은 일정한 시점에 자신의 기억과 정체성을 멈추어버리고자 하는 의지의 소산이다. 그녀는 결혼할 수도 있었고 제자를 육성할 수도 있었지만, 새로운 삶을 거부하고 아편을 피우며 과거의 기억을 반복적으로 되새기다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반면 엽문은 쏟아지는 빗방울이나 물웅덩이의 흔들리는 수면에 비친 실루엣처럼 액체적인 물의 이미지와 함께 나타난다. 시간의 흐름과 가변성을 단번에 시각화하는 무상(無常)의 이미지. 생계를 위해 제자를 받는가 하면 고향인 광둥의 담배가 아닌 홍콩 담배를 받아들이는 등, 타지 생활에 적응해나가는 엽문의 모습은 예전 기억에 얽매여 1950년대 홍콩이라는 현실에 안착하지 못했던, 아무 것도 생성하지 않음으로써 죽음의 선을 달렸던 궁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출구전략-망각, 혹은 수직과 수평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에서 지금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을 '역사적 인간'이라고 부르며 이런 인간은 불행을 숙명처럼 짊어질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분명 한 인간에게 정체성-동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기억이다. 하지만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한 새로운 삶의 생성은 멈추어버린다.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기억에 고통받는 궁이의 모습을 보라. 현재의 시간 속으로 죽은 과거, '골동품적 역사'(니체)를 끌어들이길 반복하는 몽유병적인 존재. 이런 이들에게 현재는 과거를 투사하기 위한 스크린에 지나지 않는다.

왕가위의 영화들은 이처럼 항상 현재의 시간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과거에 집착해 미래를 방관하는 인간군상을 다뤄왔다. '중경삼림'(1994)에서 떠나간 연인의 기억에 잠식돼 누군가 방을 청소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젊은 경찰관 633, 애인을 잊지 못해 고향 백타산이 보이는 사막 언저리에 초막을 지은 '동사서독'(1994)의 구양봉, 앙코르와트의 벽 틈새로 소중한 기억을 파묻어버렸던 '화양연화'(2000)의 추모완 등을 보라. 이들은 과거의 시점, 과거의 기억에 대한 집착이 강한 나머지, 일정 시점에서 의식의 흐름을 멈추어버린 채 살아간다. '일대종사'의 궁이는 이전 왕가위 영화 속 인물의 연장선에 있다.

그런 점에서 엽문은 왕가위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특이점을 만든다. 망각(vegessenheit) 또한 삶의 조건이리니. 예전에 누리던 삶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기에 엽문은 거리낌 없이 생성과 변이(transmutation)의 선을 그리며 다른 존재가 '될(devenir)' 수 있었다. 그러나 엽문이 단순히 과거를 지우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스승 진화순으로부터 물려받은 불산 영춘권의 명맥을 이어가면서도, 홍콩에서 새로이 펼쳐질 영춘권의 장래성을 내다본다. 과거를 기억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으며, 미래를 전망하지만 현재로부터 손발이 떠나지 않음이니,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 서두와 끝에서 언급한 '수직과 수평'의 의미가 드러난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역사를 긍정하면서도(수직) 지금 이 순간, 존재가 발을 디디고 선 현재의 지평(수평)을 놓치지 않음이니, 과거를 돌아보며 반성하고, 미래를 꿈꾸지만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 이것이 지혜로운 자의 처신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삶의 지혜를 실천하면서 사는 이는 극히 드물다. 푸시킨의 '인생'이 노래했던 것처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이거나 '지나간 것은 곧 그리움이 되'리니, 아직도 우리의 의식은 지나간 시간의 기억에 얽매여 있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에 대한 몽상(夢想)으로 치달으며 현재라는 지평을 떠나있지 않은가?


# 왕가위의 '일대종사'

왕가위의 '일대종사'는 세 가지 버전의 편집본이 있다. 중국과 홍콩에서 상영한 오리지널 버전(130분)과 여기서 많은 분량을 삭제한 북미 개봉 버전(108분), 그리고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공개한 인터내셔널 버전(122분)이다.

국내 개봉작은 인터내셔널 버전으로 정서적인 감흥에 중점을 둔 오리지널과 달리 이야기의 맥락과 인물들의 면면을 잘 드러내도록 설명적인 장면들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엔딩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데, 오리지널 버전은 궁이가 복수를 맹세했던 폐사지의 벽에 불상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장면으로 마치는 반면, 인터내셔널 버전 엔딩은 엽문의 제자였던 이소룡이 남긴 말과 본편에 포함되지 못했던 아웃테이크 장면의 몽타주로 처리된다.

조재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