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의 삽화.

- 신생 강국 美 상징 피쿼드호
- 독재자 선장 에이헙 지휘로
- 반문명적인 악으로 선동된
- 거대한 하얀 고래 쫓다 침몰

- 남양군도 원주민 선원 퀴퀘그
- 제 죽음을 예감하고 관 제작
- 퀴퀘그와 교감 나눴던 주인공
- 그의 관을 잡고 홀로 살아남아

- 미디어·정치 구호 속 현대인
- 거대 담화의 '포로'가 되어
- 이익집단 정당성 획득 절차로
- 민주주의의 타락 방관하기도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인 까닭에 곧잘 의미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의미는 인간 존재를 떠받치기도 하지만, 자기 존재를 망각하게 하기도 한다. 자기 삶과 관계 안에서 생성되지 않고 주입되거나 이식된 의미를 '자기 것'으로 동일시할 때, 우리는 자기 존재를 배신한다. 이른바 거대 담화(의미)의 위력이다. 문제는 많은 현대인이 구체적인 관계 속의 생성 의미보다 미디어, 광고, 정치 구호 따위가 던지는 이식 의미에 쉽게 빠져드는 데서 발생한다. '다른 생각'이 곧 불안과 고통의 원인으로 대체되는 과정이다.

신경증(노이로제) 환자는 강박감과 공포증이 던져주는 고통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에서 치유될 수 있다. 이를 위해 관계와 대화가 중요하며, 여기서 특정 의미에 묶여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그 얄궂은 자신을 직접 대면하고 (비)웃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자기 통제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빅터 프랭클의 정신치료 요법인 '역설적 의도(paradoxical intention)'의 핵심은 (비)웃음이다.

■양키 제국과 금권정치의 횡포

세계의 많은 국가는 20세기까지 서구 민주주의를 표준으로 삼아 정치 시스템을 '발전'(?)시켜 왔다. 미국식 민주주의를 교과서이자 도서관으로 삼았던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미국은 1776년 독립혁명 이후 자유, 평등, 행복추구권을 인간의 보편적 권리로 천명한 '독립선언서' 정신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나선다.

화려한 정치적 구호와 명분으로 치장된 미국 민주주의는 1850년대 들어 중요한 시험대에 올랐다. 1800년대 미국은 국내적으로 대륙횡단철도와 함께 뻗어 가는 서부 개척(frontier)에 힘쓰는 한편, 국제적으로는 신흥 산업자본에 기반을 둔 정경유착의 금권정치(plutocracy)가 제국의 야망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가장 모범적인 정치제도뿐 아니라 경제 부국으로 세계 무대에 등장한다.

또한, 전통적으로 농업에 기반을 둔 게으르지만 품위 있는 '노예주' 남부 귀족(민주당)과 국토 개발과 산업 팽창에 부지런한 '강도 남작'(robber baron) 양키(공화당)의 정치·경제적 대립은 남북전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헨리 데이빗 소로의 '납세 거부'와 '시민 불복종' 주장은 정상배들의 횡포에 맞서는 몸짓 중 하나였다.

미국 작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모비딕'(Moby-Dick·1851)은 근대 부르주아 이익집단의 정당성 획득을 위한 단순한 절차에 불과한 '민주주의'라는 국가 시스템의 이상과 현실을 성찰한다. 무명작가였던 그는 '주홍글씨'의 선배 작가 나다니엘 호손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탈고 과정에 있던 '모비딕'을 "무자비한 민주주의(ruthless democracy)에 관한 내용"이라고 소개한다.

■피쿼드호의 '무자비한 민주주의'

허먼 멜빌의 묘지. 왼쪽이 멜빌 묘지석이고 오른쪽은 그의 부인 묘지석. 배윤기 제공

'모비딕'의 작품 무대는 포경선 '피쿼드호'. 제국 경쟁의 대양에 막 뛰어든 신생 강국(미국)이 배로 형상화된다. 그 인적 구성은 미국 사회의 축소판이다. "순수 미국인은 대체로 두뇌를 제공하고, 나머지들은 분수에 맞게 기꺼이 근육을 제공한다." 여기서 나머지들은 흑인과 인디언 등 유색인에 더하여 가난한 이주 노동자들이다.

'최고 주인이자 독재자'인 선장 에이헙은 비상하고 '원대한 생각'을 품은 영웅이다. "말은 적지만, 일단 말하기 시작하면 귀 기울이게" 한다. "설교단은 언제나 이 세계의 뱃머리이며, 나머지 모두는 뒤에서 따라온다. 설교단이 세계를 인도한다." 설교단은 정교일치에 가까운 미국 정치 시스템의 비유다. 말이 세계를 창조하고 이끈다.

하얗고 거대한 크기의 고래, 모비딕은 인류가 도전하고 정복해야 할 길들지 않은 자연, 반문명적인 악, 공포를 낳는 실체 없는 존재로 언급된다. 그것은 서구 백인종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백인 지배의 순수한 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지도자 에이헙은 위협과 유혹의 탁월한 선동으로 모비딕을 향해 돌진하지만, 결국 모비딕 앞에서 피쿼드호는 침몰한다.

작품의 화자이자 혼자 살아남는 주인공 이스마엘은 남양군도 원주민 작살잡이 퀴퀘그와의 대화와 사귐을 통해 문명인 혹은 백인종 문화가 강제하는 다른 문화에 대한 편견을 성찰하고, 교정하며, 산업화한 포경의 고래 남획을 비판한다. 그는 편협한 기독교적 고집에서 벗어나고 마침내 동일시로 인한 두려움의 원인에서 해방된다.

멜빌의 유일한 희망(열린 태도와 관계를 통해 의미를 생성하려는 노력)은 자신(자기 문화)을 (비)웃는 이스마엘에서 어렴풋이 나타난다. 퀴퀘그가 제 죽음을 예감하고 만든 관을 붙잡은 이스마엘은 침몰하는 배와 함께 모두를 삼켜버린 바닷속에서 불쑥 솟아난다. 홀로 남은 그는 "아, 우리는 얼마나 즐겁게 그 파멸의 길에 자신들을 위탁하고 있는가!" 라고 말한다.

■'잡힌 고래' 혹은 '놓친 고래'

멜빌은 오대양 곳곳에서 열강 제국 선박들의 고래잡이 경쟁이 연출하는 피바다, 즉 '레드오션'의 규칙(국제법)을 '잡힌 고래'와 '놓친 고래'로 설명한다. "1. 잡힌 고래는 붙잡고 있는 쪽 소유이고, 2. 놓친 고래는 누구라도 그것을 먼저 차지하는 쪽 소유인 것이 정당하다"는 원칙이다. 이런 논리는 구체적으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영국의 아일랜드와 인도, 미국의 멕시코 등 영토 팽창으로 예시된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미국 노예의 육체와 영혼, 죄가 드러나지 않은 악당의 저택, 거간꾼에 저당 잡힌 굶주리는 빈곤층, 성직자에게 돈을 바쳐야 하는 등뼈 부서진 노동자들이 바로 '잡힌 고래'라고 설명한다.

나아가 멜빌은 "인간의 권리와 세계의 자유, 그것도 놓친 고래가 아니고 뭔가? 모든 인간의 마음과 사상은 놓친 고래다. 그들이 갖는 종교적 신념의 원리 또한 놓친 고래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 커다란 지구 자체가 놓친 고래라는 것쯤 누구나 알지 않는가? 그리고 독자 여러분 역시 놓친 고래인 동시에 잡힌 고래 아니고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배윤기

얼마 전 우리 공동체의 방향타를 위탁하는 선거가 끝났다. 어차피 똑같은 먹잇감이지만, 우리는 우리를 '잡힌 고래'라고 생각하는 후보를 찍었는가, '놓친 고래'라 여기는 후보에게 표를 던졌는가? 우리는 우리의 항해를 성찰하며 (비)웃을 수 있을까? 웃음이 만드는 빈자리는 다른 관계의 공동체를 구상할 여지가 될 수도 있다.


# 허먼 멜빌과 '모비딕'

허먼 멜빌(1819~1891·사진)은 그의 사후 20세기 들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그의 소설 '모비딕'을 종교적이고 초월적으로 해석하는 평론이 많아 우리가 그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읽기도 했다. '모비딕'을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이 대양을 누비는 장대한 모험의 낭만과 고래잡이에 비유된 인간의 도전을 거론하는 이유도 거기 있다.

그러나 주류 평론과 다른 새로운 '모비딕' 읽기는 멜빌의 언급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기 시작했고, 이제 미국의 백인 독자뿐 아니라 흑인을 비롯해 사회의 소수자와 생태론자들은 '모디빅'을 근대의 이상과 욕망을 풍자한 19세기 대서사시로 받아들이고 있다. 멜빌도 선배인 나다니엘 호손과 더불어 인간과 인생에 비극적 통찰을 한 철학적 작가로 거듭나고 있다

한편 뉴욕에서 태어난 멜빌은 실제로 포경선 선원으로 남태평양을 항해했으며 이 경험을 '모비딕'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 녹여 냈다.


# 뉴욕타임스 '모비딕' 제목 오기

- 멜빌 사망때 책 몰이해 드러내

뉴욕타임스 1891년 9월 29일 자에 실린 허먼 멜빌의 부고 기사. 허먼 멜빌이 뉴욕시 이스트 26번가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그가 '타이피' '오무' '모비딕' 등을 쓴 작가라는 설명을 붙였다. 이 기사에서 멜빌의 대표작 'Moby Dick'을 'Mobie Dick'으로 잘못 표기한 것은 작품이 당시에 잘 읽히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증거로 많이 거론된다.

배윤기·부산참여연대 부설 리더십교육센터 소장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격주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