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비 사회를 넘어서
- 세르주 라투슈 지음/정기헌 옮김/민음사/1만2000원
현대인의 필수품으로 여겨지는 스마트폰 수명은 얼마일까. 대부분 2년 이상 쓰지 못한다. 2년 넘으면 고물이라는 인식이 고정관념처럼 자리 잡았다. 이처럼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는 구매 후 얼마 되지 않아 구형이 된다. 숨돌릴 틈 없이 신형이 등장하거나 특정한 기능이 갑자기 떨어지기 때문이다. 새 차 역시 오래 타지 못한다. 오죽했으면 자동차 10년 타기 운동이 벌어졌을까.
뭔가 이상하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자동차를 만드는 기업은 세계 최고 기술력을 자랑하는 회사들이다. 그런데 수명이 왜 그렇게 짧을까. 여기에는 성장을 멈추면 죽는 자본주의의 실체가 숨어 있다. 이 실체를 보여주는 낭비 사회를 넘어서가 나왔다. 저자는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로 대표적인 탈성장 이론가다.
저자는 '계획적 진부화'라는 경영학 용어를 통해 극으로 치닫는 자본주의의 민낯을 보여준다. 계획적 진부화는 소비자들이 기존 제품을 버리고 계속해서 새 제품을 구입하게 하려고 일부러 상품의 수명을 단축하는 것을 말한다. 용어만 낯설 뿐 내용은 익히 알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를 살펴보자. 애플의 아이팟 배터리는 제조 단계부터 수명이 18개월로 제한됐고 프린터는 인쇄 매수가 1만8000장이 되면 자동으로 작동을 멈추게 하는 마이크로칩이 내장돼 있다.
자본주의가 처음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1920년대 생산된 전구 평균 수명은 무려 2500시간이었고 1940년 듀폰사에서 출시된 여성용 스타킹은 자동차 한 대를 끌만큼 튼튼했다. 하지만 이렇게 잘 만든 제품은 소비를 위축시켰고 생산-소비-성장으로 이어지는 자본주의 바퀴를 멈추게 했다. 바퀴를 다시 굴리려면 소비가 필요했고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계획적 진부화가 이뤄졌다. 저자는 '생산이 계속되려면 제품들이 죽어야 한다'(39쪽)고 표현했다. 즉 구매를 통해 끊임없이 갱신되는 제품들의 죽음 덕분에 성장과 소비 사회가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다.
저자는 일회용 면도기나 콘돔, 식료품의 유통기한, 수명이 2~3년에 불과한 전자기기 등은 계획적 진부화의 산물이며 이를 통해 낭비사회가 만연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계획적 진부화에 따른 자원 고갈과 생태계 파괴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저자는 낭비사회 대안으로 '탈성장 사회' 건설을 제안한다. 계획적 진부화를 제품의 지속 가능성, 수리 가능성, 계획적 재활용으로 대체해 '생산 감축' 계획을 추진하면서 성장 없는 번영과 검소한 풍요 사회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때 '아나바다'(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 쓰는) 운동이 국내에서 요란스럽게 진행되다 잠잠해졌다. 다시 아나바다를 외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의 소비 패턴이 계획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물결 위에 있다는 점을 자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