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트루먼을 화면으로 살펴보고 있는 크리스토프 감독의 모습이 담긴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트루먼은 결국 자기 손으로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가 경계의 문턱 너머에서 진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국제신문 DB

- 근대 철학의 기반 완성 헤겔
- 국가 이성을 神의 반열 올려
- 개인을 훈련·교화 대상 삼는
- 영웅 통해 '역사의 종언' 시도

- 영화 '트루먼쇼' 속 설계자
- "현실은 구역질 나는 장소"
- 출생부터 주인공 관리하며
- 완벽한 행복을 줬다고 생각

- 계획에 따라 무대서 퇴출
- 연인 그리워하던 트루먼
- 거대 스튜디오의 문 열며
- '멋진 신세계'를 무너뜨려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이고 관계적이다. 경험하는 주체가 다른 까닭이다. '갑-을' 관계는 이런 공간을 명확하게 그려준다. 갑이 경험하는 공간은 대체로 '자유'지만, 을은 언제나 '가시방석'이다. 공간의 성격은 관계의 거리 또한 결정한다. 물리적 원근을 막론하고 불통과 불화는 금성과 화성 사이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남이가' 식의 표현은 그 거리의 고통과 성찰을 덮어버리는 마약 같다.

■'겨울왕국'이 보여주는 두 개의 공간

영화 '겨울왕국'에서 아렌델이라는 초현실적 고립의 성은 마음의 거리를 보여준다. 거기서 고독한 군주, 엘사는 아름다운 마녀로 변신한다. 아렌델은 여태까지와 다른 새로운 질서의 '동토의 왕국'으로 변한다. 겨울왕국을 봄의 왕국으로 복원할 계기는 '왕과 백성의 관계'가 전제하는 영웅이나 세계를 바꿀 비상한 능력이 아니라, 소통과 이해를 통해 사랑이 깃드는 구체적인 관계 회복에서 찾을 수 있다.

근대의 철학적 기반을 완성한 헤겔은 국가를 신과 동등한 반열에 올림으로써, 국가주의와 영웅주의를 절대화한다. 세계사를 선도하는 국가 건설을 위해 미개한 개인을 훈련·교화하고, 시대정신의 빛을 던지는(en+lighten+ment·계몽) 영웅이 "자신이 가는 길 앞에 놓인 많은 죄 없는 꽃을 짓밟고, 많은 것을 밟아 뭉개는 것도 하는 수 없는 일"임을 강조한다. 역사 발전과 진보의 길에서 주인과 노예, 지도자와 대중, 전문가와 일반인 등과 같은 위치 구분은 사회역사적으로 정당화된다.

관계가 결정하는 다른 공간 체험인 '자유'와 '가시방석' 사이, 이곳을 지배하는 권력은 제도적·비제도적 예외 상태를 은폐하거나 노출하는 기술을 발휘한다. 사회가 전제하는 '우리'라는 포괄적 관념은 능력(금력과 권력)의 차이를 근거로, 다시 우월한 '우리'를 노출하고 '나머지(잉여)'를 은폐함으로써 분리·배제한다. 상업광고와 정치 공약 등이 배치하는 당근과 채찍, 유혹과 위협이 그것이다.

전과 후(before/after), 극적 대비가 으뜸이다. '전'은 시대에 뒤처진 후진·미개·불결·무질서이며, '후'로의 진보는 세련된 선진·계몽·청결·질서다. '후'를 규범으로 '전'에게 처방의 권력을 행사하는 근대성 공간의 궁극 지점은 '역사의 종언'이다. 완벽한 계획과 질서를 갖춘 이상적 공간은 발전·개선을 목표로 어떠한 의식적인 노력도 할 필요가 없는 단순 반복 속에서 자유를 향유하는 '파라다이스'다. 우리는 '전'으로 취급받는 '지금, 여기'에 거주하지 않고, '후'에 대한 믿음·방식·표현으로 유도되고 있지는 않은가? 다양한 텍스트들이 그리는 인류 미래상이 어둠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인 이유는 여기 있다.

■진짜와 가짜 사이, 권력의 공간

공간과 관련, 영화 '트루먼 쇼'(The Truman Show)는 흥미롭게 생각의 문을 열어준다. 영화는 주인공이 쇼의 설계에 따라 제공되는 '행복한 천국'을 탈출하는 이야기다. 부모부터 친구와 아내, 주변 사람까지 모두 그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일거수일투족 감시하고 일탈을 가로막는 배우들이다. 쇼의 무대는 각본에 따라 중앙 통제되는 거대 스튜디오 안의 작은 섬, 질서정연한 낙원이다.

설계자의 상상이 실현된 그 체제는 완벽한 조건과 완전한 행복을 선사한다. 어떠한 대안이나 상상도 차단되며, 실행 또한 가로막힌다.

영화 화면은 눈의 형상이다. '행복한' 트루먼의 일상은 '카메라의 눈'을 통해 24시간 전 세계에 생중계된다. 생중계를 보며, 즐거움과 위안을 얻는 시청자는, 눈앞에 전시·광고되는 물건의 소비자들. '진짜 인간(true+man)의 공간.' 그 세계가 '트루 맨'의 공간이라면, 현실세계 시청자는 '가짜'가 되는 셈이다.

감독은 목표 성취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목적론자이며, 주인공 트루먼을 출생부터 줄곧 관리해왔다. 감독이 그에게 "너보다 내가 너를 더 잘 알아"라고 장담하는 이유다. 그는 이성과 합리를 축으로 하는 근대성의 두뇌를 대표한다.

어떻게 30년 동안 트루먼이 진상을 모르도록 했는지 묻자, 감독은 "이유야, 간단하죠. 우리를 나타내 보여주는 그 세계에 우리가 순응하기 때문이죠"라고 답한다. 이 감독의 이름은 크리스토프(Christof), 세계의 창조주(Christ of the world)다. "구역질 나는 장소"라며 현실 세계를 혐오하는 그는 그 세계에 '진짜 인간'을 창조하고, 보호하는 신이다.

■경계의 문은 언제나 '내' 앞에 있다

문제는 창조주가 줄 수 없는 한 가지 때문에 생긴다. 사랑의 감정과 그에 맞는 대상이다.

계획에 따라 무대에서 퇴장한 아버지와 연인을 그리워하는 트루먼은 그들을 찾아 방황하고, 각본과 어긋나는 상황이 이어진다. 평온한 천국은 혼란에 빠지고, 마침내 트루먼이 실종된다. 트루먼은 첫눈에 반한 사랑을 찾아 그 세계의 끝, 경계를 향해 간다.

언제나 준비된 정답을 가르쳤던 주인이 노예에게 "트루먼, 어디로 가고 있어?"하고 질문하는 상황은 관계 역전이다. 결국, 감독의 '멋진 신세계'는 자기가 이해하고 지배한다고 확신했던 바로 그 대상에 의해 구멍 뚫리게 된다. 트루먼이 거대 스튜디오의 닫힌 문을 자기 손으로 열고, 경계의 문턱 너머에서 '진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지켜보던 시청자는 환호한다. 새로운 공간의 가능성이 시작된다.

크리스토프는 자기 상상력과 설계를 파괴하고 그릇됨을 증명해야 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자기 상상을 사랑하고 신앙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 상상이 스스로 공허함과 채워지지 못함을 드러낼 때, 그 상상이 바로 무(無)에서 조작되었다는 진상을 보여줄 때, 그때야 비로소 그는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진리의 대가를 치르고, 자기가 구원했다고 생각해온 트루먼이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경계의 문은 언제나 '내' 앞에 있다.


# 언어란 세속적인 존재의 그릇, 화자의 '장소'와 분리될 수 없어

근대적 삶은 질서정연한 설계, 발전, 이상적 미래상 등을 재현하는 공간적 상징에 도취하도록 짜인다. 그 휘황찬란함은 어두운 데서 보면 더 잘 보이는 까닭에, 우리 내면을 어둡게 유지하도록 유도된다. 지구 이편과 저편의 풍경과 삶과 이야기가 같아지고 있다. 이제 언어적 재현은 더는 살아있는 사람(삶)의 시간과 공간을 담지 않는다. 장소 없는 언어, 텅 빈 공허한 시간의 언어이며, 설계·이론·이념의 시공간을 확산하는 기호일 따름이다.

경계의 인문학은 이야기의 시공간 문제를 두고 씨름한다. 언어가 장소 초월적인 신성한 이야기의 그릇이 아니라, 장소 기반의 세속적인 존재의 그릇이라는 원점에 주목한다. '말하는 사람의 장소'와 '언어가 담는 공간'이 분리되는 과정과 결과를 탐색하고, 차츰 지워지고 버려지고 있는 '지금, 여기'라는 구체적 만남의 공간에서 생성되는 인간 삶의 무늬의 소생 방도를 모색한다.

배윤기·부산참여연대 부설 리더십교육센터 소장

※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격주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