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엘코 섬 원주민 출신 음악가 '구루물 유누핑구'. 뮤직컴퍼스 제공

- 6만 년 이어온 호주 엘코 섬의 자연과 사람 노래하는 '구루물'
- 생명을 살리는 '여성성' 강하게 어필하는 '반했나' 공연
- 듣는 이 편안하게 안도시키며 담담히 '희망' 이야기하는 아티스트들

역사는 진보하는가. 이 질문은 '인간은 노력하면 행복해지는가'란 질문과 닮은 점이 많다. 어쩌면 '역사가 진보할 것'이란 믿음은 '노력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란 믿음 만큼이나 순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진보'나 '행복'이란 말 자체가 기실 서구 근대가 낳은 하나의 판타지에 다름 아닌 실체 없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경건한 마음으로 행하는 최선과 일상이 진보나 행복 같은 결과를 염두에 둔 투자 같은 것일 리도 만무하다. 그래서인지 지식, 과학, 이념 같은 것이 지닌 독성에 지치게 되고 매일매일 주변을 떠도는 공허한 말 잔치에 염증이 심해질수록 지금 여기, 주변을 새삼스레 돌아보는 날이 많아진다.

■세상을 바꾸는 건 '순(順)한 마음들'

'반했나' 공연을 기획한 연희.

최근 '노란봉투 프로젝트'가 화제다. 지난해 12월, 셋째 아이의 출산을 앞둔 평범한 주부 배춘환 씨가 보낸 한 통의 편지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이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의 동참으로 이어졌다. 참여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돈을 내면서도 오히려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했으며 누군가를 도우려던 작은 실천으로 사실은 그 자신이 먼저 치유 받았음을 고백하는 희한한 풍경이 벌어졌다.

세상을 조금이나마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이들은 누구일까. 다름 아닌 '순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들이 젠체하는 개념이나 담론을 입에 올리는 걸 거의 본 적 없다. 누군가에게는 어리석은 대중으로, 누군가에게는 그저 왜소한 소시민의 하나로 지탄받기도 하지만 내 생각엔 이들이야말로 사회의 흙이고 풀이며 바다다. '순(順)'한 사람들, 이들은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인간에 대한 원시적 감수성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다정'한 사람들이다.

반면 나는, 시간이 갈수록 세상을 더 낫게 만들겠노라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쓴 채 역사의 진보나 개발, 이념이나 전략을 들먹이며 화살을 엉뚱하게 주변 사람에게 겨냥하는 이들과 마주칠 때면 그들의 선의와 관계없이 자꾸만 그들 때문에 세상이 더 추레해지는 것 같아 불편해진다.

■'구루물 유누핑구'를 아시나요

'구루물 유누핑구(Geoffrey Gurrumul Yunupingu)'는 사연 많은 뮤지션이다. 그는 호주 북부 엘코 섬에서 6만여 년 전부터 살아온 원주민 구마티 부족의 일원이다. 그들은 원시공동체 사회를 여전히 유지해 사적 소유가 없고 아이들을 공동 육아한다. 그래서 구루물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지만, 공동체의 충분한 보살핌 덕에 신이 자신을 사랑함에 한 치의 의심 없이 밝게 성장했다. 혜성처럼 등장한 그의 음악에 스팅, 엘튼 존과 같은 팝의 거장들조차 팬임을 자처하며 함께 공연할 것을 제안했고 실제로 많은 공연을 했다.

하지만 그는 한창 유럽 투어 도중이던 2010년 7월, '고향이 그립다'는 한 마디를 남긴 채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엘코 섬으로 돌아갔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2000명가량이 모여 사는 엘코 섬에서 다 함께 같은 언어로 소통하고 같은 문화를 공유하며 민꽃게와 거북이 등 전통음식을 나눠 먹으며 사는 삶"이라던 그의 말은 자주 회자했다.

6만 년 동안 전해져 온 엘코 섬의 옛이야기와 자연, 조상과 땅을 노래하는 그의 음악은 듣는 이를 압도하기보다 편안하게 안도시킨다. 세련되지도, 격정적이지도 않지만 따뜻하고 다정하며 자극적인 치장이나 허세를 벗어던진 담백하고 원시적인 매력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정갈하게 씻어준다. 그의 음악을 듣다 보면 속도와 효율성, 자본과 경쟁의 논리로 점철돼 상시적으로 사람을 긴장시키고 압박하는 현대사회에서 새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가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있던 시절의 어떤 희미한 원형을 마주한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반했나' 프로젝트와 '연희'

지난해 부산에서 시작해 서울, 진주, 대구 등 여러 도시를 순회한 부산 여성 뮤지션들의 기획공연 '반했나'는 여러모로 주목할 점이 많은 공연이다.

근대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해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는, 생물학적 차원이 아닌 사회적 성으로서의 '여성성'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이 공연은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 살리고 키우는 일에 본능적으로 더 주목하는 여성성의 장점을 잘 보여준다.

이 기획의 중심에서 활동한 연희는 한국 인디 1세대 여성밴드 '헤디마마' 출신이다. 여성이란 편견에 도전하듯 강렬한 사운드를 들려주던 '헤디마마' 이후, 그녀는 서구식 록 밴드의 악기편성을 벗어던진 새로운 스타일의 월드뮤직밴드 '뭄바트랩'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솔로로 활동하며 또 한 번 새로운 진화를 모색 중이다. 이러한 연희의 음악적 행보는 남성 중심, 서구 중심, 경쟁과 효율성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느끼고 껴안으려는 한 예술가의 인식론적 전회를 보여준다. 그녀가 천명실과 함께 결성한 듀오밴드 '뭄바트랩'의 1집 수록곡 'Looking for the sunrise'는 부산 뮤지션답게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파도소리로 시작해 몽환적인 사운드와 편안한 스타일의 보컬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희망이란 어떤 모습일지 담담하게 들려준다.

'쿨 cool'과 '핫 hot' 사이에 '웜 warm'이 있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 '다정'이 있다. 수구적 태도와 혁명에 관한 담론은 극과 극이 통하듯 닮은 점이 많다. 단순한 양비론이 아니라 이미 역사가 그 메커니즘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과 사회는 저마다 적정 체온을 유지해야 한다. 사상이나 지식의 깊이를 떠나 지식인의 사명은 '잔소리'가 아니라 '실천'일 것이다. 그것도 '다정한 실천!' 무엇보다 이 다정한 실천은 그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것을 확신한다.


# '연희' 주축으로 뭉친 부산 여성 인디 뮤지션들

■ 구루물과 '반했나' 공연

구루물 유누핑구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한 시각장애인 아티스트다. 그는 정규 음악교육을 받지 못해 전문가조차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왼손잡이이면서도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거꾸로 들고 연주한다.

호주의 음악감독이자 이후 가장 가까운 동료가 되는 마이클 호넨을 만나면서 2008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는 그의 음악을 "추운 밤 장작불 같은 위안을 주는 음악"이라 평했다. 데뷔 이듬해인 2009년 호주 아이튠즈 판매량 1위,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100만 장이 넘는 음반 판매 등을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켰고 영국의 월드음악 전문지 '송라인즈'는 그를 '올해의 아티스트'로 선정했다.

부산의 여성 뮤지션 기획 프로젝트 '반했나'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콘셉트의 기획공연이다. 헤디마마와 뭄바트랩을 거쳐 솔로로 활동하고 있는 연희가 주축이 되어 동시대 활동했던 1976년 전후 태생인 부산의 인디 1세대 여성 뮤지션 김윤정, 윤진경, 자이, 진경 등과 최근 부산의 신예 여성밴드로 상큼하고 편안한 음악을 들려주는 후배 밴드 '달콤씁쓸한'이 함께한다.

사회학자·호밀밭 출판사 대표

※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격주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