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본령은 '나'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이다. 경계의 인문학은 일상에서의 '사유'와 '언어'의 시공간을 탐색하고 심문한다. 그래서 일상화된 불화와 갈등의 저변에서 근원적으로 관계를 가로막고 분리시키는 시공간 전도의 '사유'와 '언어'를 문제 삼는다. 랠프 엘리슨(왼쪽)과 밀란 쿤데라 의 작품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배윤기 제공

- 돈과 권력, 성공을 향한 질주
- 같은 목표를 향해 박제화된 삶
- 제대로 방향 잡고 가는지 불안
- 현대인의 공포는 여기서 출발

- 학원에다 토익공부, 또 재교육
- 요람에서 무덤까지 경쟁 연속
- 사회는 화려한 미래 약속하지만
- 정작 책임질 주체 어디에도 없어

- 현존하지 않는 시공간에 갇혀
- 때로는 낙심과 절망에 허우적
- 잠시 멈추고 현실 객관적 탐색
- 비로소 진정한 나 발견하게 돼

경계란 무엇일까? 경계를 생각하다 문득, 랠프 엘리슨 소설 '보이지 않는 인간'의 인상적 표현 중 "Keep This Nigger-Boy Running(이 검둥이 녀석을 계속 달리도록 하시오)"란 말을 떠올린다. 험한 인생길을 막 내딛는 주인공에게 백인 후원자가 써준 추천서 마지막 대목이다. 대개 '달린다'는 말이 '사회적 성공'을 의미하지만, '기억·사고의 제거'를 뜻하기도 한다. 꼭 쳇바퀴에 갇힌 다람쥐 신세 말이다.

밀란 쿤데라는 '느림'에서 이런 예를 든다.

"웬 사내가 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문득, 그가 뭔가를 회상하고자 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순간, 기계적으로, 그는 자신의 발걸음을 늦춘다. 반면, 자신이 방금 겪은 어떤 끔찍한 사고를 잊어버리고자 하는 자는, 시간상, 아직도 자기와 너무나 가까운, 자신의 현재 위치로부터 어서 빨리 멀어지고 싶다는 듯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한다."

■시선 전쟁 : 보는 자와 못 보는 자

빠름은 뭐든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못 보면 기억도 생각도 할 수 없다. 생각 혹은 의심이 없다면 순응·교화되기 쉽다. 속도에 중독된 근대문명 안에서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요, 믿는 것은 아는 것이며, 지식은 곧 권력(돈)이라 가르친다. 이런 과정은 학교·종교·미디어 등 합리적 시스템을 통해 이뤄지며 관리된다. 합리는 법·제도 따위가 추구하는 체계와 질서로 나타나고, 투명성을 공언한다. 같은 맥락에서 불합리를 합리로, 불투명을 투명으로,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일이 바로 속도의 효율을 기약하는 '발전'으로 정의된다.

엘리슨은 말한다. '보이지 않는 인간'은 사람들이 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현대인의 눈은 카메라의 눈으로 대체됐다. 대중매체가 보여주지 않으면 사람은 보지 않고, 결국 함께 살아도 서로가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의 눈을 장착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본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 '보이는 인간'들은 항상 대중 호주머니와 투표권을 보고 계산하고 분류해 놓는다.

여기서 정작 보는 자와 못 보는 자의 위치는 거꾸로 되고, 이는 계급·출신·인종 따위를 기준으로 엄연하게 나뉜다. '못 보는 자'들은 미디어가 전달하는 훌륭하고 화려한 그들, 즉 보이는 동시에 '보는 자'가 되려고 경쟁한다. 거긴 돈(경제)과 권력(정치)이 있다. 1%만 성공해도 상관없다. 어쨌든 함께 달려가는 거대한 대열을 형성한다.

일상 삶에선 이런 모양이다. 설사 마주 보더라도 목표로 사람을 싸잡아 버린다. 그럼에도 제대로 방향을 잡았는지, 늘 불안하고 두렵다. 현대인의 공포, 뿌리는 여기서 비롯되고 닦달하는 분위기로 가중된다. 추세가, 트렌드가 어떠니, "이럼, 안 돼", "너는 어떻게 할래?" 따위다.

■나는 왜, 나로부터 도피하는가?

우리가 소비하는 이야기는 정치와 경제 외엔 별로 없다. 유통하기 쉽게 계량한 통계와 정보가 제시되는 까닭이다. 영화나 책 이야기조차, 예산은, 얼마나 팔렸고, 대박이다 아니다, 정치적 영향은 어떠니, 그래서 "너는 봤니?" 정도다. 자기 느낌, 생각, 이야기를 꺼내기는 낯설고, 뜸해지고, 급기야 하찮게까지 여긴다. 외모부터 생각과 생활방식까지 자기부정·혐오를 교화받지 않는가?

"~해야 한다"가 입에 달린다. 숫자, 기호, 공식으로 덮어씌워 제공되는 목표는 추상적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게다가 99%는 평생 경쟁해도 도달 못 한다. 그러니 더 매력적이다. '사회'가 조장한 목표는 화려한 미래를 약속하지만, '객관적'이어서 정작 책임질 주체는 없다. 어쨌든 달려야 한다. 가다 실패하면 '잘못' 혹은 '무능'한 개인 책임. 고립된 개인의 마지막 선택, 자살? 우리의 자화상!

오늘도 아이들은 승합차에 실려 학원을 전전한다. 취업 준비생들, 언제 써먹을지도 모를 토익에다 제2외국어까지. 겨우 취업에 성공한 직장인은 기술·시장 변화를 뒤쫓아 늘 새로운 지식·정보 습득에 바쁘거나 재교육 프로그램에 매달린다. 거기서 또 가뭄에 콩 나듯 버틴다면, 겨우 정년 채우고 한숨 돌린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평생교육'이 기다린다. 대개 스마트 첨단 기계를 잘 소비하는 활용법이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요람에서 무덤까지' 달려야 한다. 영리해져야 한다. 또 그러려면 영악해야 한다.

■달리는 아스팔트 '너머'서 풀이 난다

세대를 거듭하여 보이지 않는 인간은 발전을 위해 그렇게 쉼 없이 달려왔다. 달릴수록 '스마트'한 기술과 제도는 점점 더 정교하고 예리하게 우리를 유혹·위협한다. 영어 'smart'는 영리하고 재치 있으며 빈틈없다고 쓰이지만, 건방지고 뻔뻔스럽게 고통을 준다는 뜻도 담고 있다. 혹시 지금 나와 스마트폰의 관계 혹은 그를 둘러싼 가족 관계를 그대로 설명하진 않는가? 이게 우리가 꿈꾸는 세상 작동방식이다. '나'의 현실이다. '나'와 현실을 부정하고 도피하며, 신화와 환상 속으로 숨어들지 않는가?

"느림과 기억 사이, 빠름과 망각 사이에" 있는 "어떤 내밀한 관계"를 탐색하는 쿤데라는 근대의 공간 안에서 빠름의 신화와 발전 혹은 진보의 환등상(phantasmagoria)에 중독된 현대인에게 '사이'의 상상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사이는 경계와 경계의 만남이다. 경계 '너머'를 상상하지 못하면 사이는 없다. 그렇다면 만남도 관계도 없다. 실제로 현대인은 서로 보지 않는다. 각자 분야별로 '훈련된'(educated), 그러나 오지 않을 미래상(시간) 혹은 이룰 수 없는 이상형(공간)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너무 멀리 달려왔다. 현존하지 않는 시공간에 갇힌 '나'는 '지금, 여기'를 외면한다. 이런 현실을 인정하려면, 경계로 가서 '내가 있는 곳'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거기서 비로소 '나' '사유' '언어' 그리고 '관계'의 시공간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해 볼 수 있다.

배윤기·부산참여연대 부설 리더십교육센터 소장


# 경계 체험을 위한 제안

-카메라의 눈을 버리고 윈도를 닫는다면? 일주일에 하루 디지털로부터 해방되자. 처음에 어색하다고, 포기 말자. 곧 집안은 이야기로 풍족해진다. 일주일 동안 텔레비전을 절대 켜지 않는 방법도 권장한다. 가족 얼굴이 보이고, 지금까지 난 뭘 보고 살았지, 궁금해지면, 실험 성공.

- "~해야 한다" 없이 말해보자. 대개 이런 말은 추상적 이념이나 진리를 갖고 사람(의견, 주장)을 덮어쓰기 한다. 상습적으로 "필연적" "사회 발전" "국가적 요구" 등을 갖다 붙인다. 많이 쓰다가 안 쓰면, 별 할 말이 없어진다. 자연히 듣게 된다. 대화가 시작된다.


※경계의 인문학

	왼쪽부터 월터 미뇰로, 지그문트 바우만, 김영민

근대문명과 학문은 보편성을 공언한다. 경계와 바깥에서 보면, 보편 논리는 자연스럽게 날조된(naturalized·이식된) 경계를 가리는 환상이다. 환상에의 도취는 자유이지만, 현실은 항상 개별 책임이다. 제도 학문은 보편의 팽창과 이식 수단이다.

경계의 인문학은 보편의 허구라는 버섯구름에 가려 사소하게 보도록 조작된(localized) 인간 삶의 터전(locality)에 주목한다. 물질의 무늬(物紋)가 통치하는 세상의 쓰레기통에서 인간 무늬(人紋)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경계의 인문학은 궁극적으로 관계 속의 존재로서 '나'의 발견, '나'와의 대화와 소통, '나'의 이해, 그리고 '나'를 넘어서 다시 관계의 문제로 나아간다.

여기엔 철학자 김영민, 경계사유의 월터 미뇰로와 지그문트 바우만, 급진사유의 조르조 아감벤과 프란츠 파농 등의 생각이 밑그림을 제공한다.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