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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 작가의 사진과 기록, 책 등으로 가득찬 추리문학관 2층 내부 모습. |
- 작가 김성종 사재 털어 1992년 건립
- 전국 첫 사립 전문 도서관 1호 등록
- 총탄 흔적 표지석, 나선형 계단 특색
- 코난 도일·애드거 앨런 포 등 사진 전시
- 장서 5만 권 보유, 바다 바라보며 읽어
- 부산 찾은 관광객에 추억·힐링 장소
- 해운대와 가까워 관광경로 자주 포함
- 부산 사람보다 외지인에 더 알려져
- 주변지역 문화의 거리 조성 목소리
"안개는 언덕 아래 바다로부터 마치 백만 대군이 쳐들어오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기세로 밀려들어오는데 그 속도가 매우 빨라 순식간에 언덕을 뒤덮어버린다. 처음에는 옅은 안개가 밀려오다가 뒤따르는 안개와 뒤섞여 점점 짙어지는데 그것이 거듭되면서 마침내 안개는 두터운 층을 이루면서 일 미터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짙은 장막으로 변해 언덕을 뒤덮어버린다. 그런데 그 안개를 헤치고 밑으로 내려가면 언덕 아래쪽에는 전혀 안개가 없다. 거기에서 멀리 언덕을 올려다보면 마치 속을 알 수 없는 신비한 별세계 같고 그 형상이 마치 위만 남기고 아래는 박박 깎아버린 우스꽝스러운 머리통 같아 보인다."
인용문은 추리소설 작가 김성종의 '안개의 사나이'(뿔·2008) 일부다. 안개 자욱한 몽환의 언덕은 부산 해운대 달맞이 언덕이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 배경이 되는 달맞이 언덕에 전국에서 유일한 '추리문학관'으로 자리를 잡은 지 20년이 넘었다. 이 문학관은 해운대 관광 경로에서 언제나 만난다.
■국내 사립 전문 도서관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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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탄 흔적을 묘사한 추리문학관 표지석과 김성종 작가. |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관은 1991년 건립된 박화성문학관이다(박화성문학관은 2007년 목포문학관으로 이전했다). 당시만 해도 문단이나 정부에서 문학관에 관심이 거의 없었다. 문학관에 관한 관심은 2000년 이후 급증했다. 현재 60여 개 문학관 중 85%가 2000년 이후 건립됐다.
추리문학관은 1992년 7월 전국에서 사립 전문 도서관 1호로 등록됐다. 작가 김성종의 개인 재산으로 땅을 매입하고 건물을 지어 올렸다. 특정 작가를 기념하는 일반적인 문학기념관 형식이 아닌, 추리문학이라는 장르를 주제로 내세운 독특한 취향의 공간이다. 한국 문학사에서 추리문학은 주류가 아닌 비주류, 변방의 장르로 분류됐다. 학계나 강단에서는 적자가 아닌 서자였지만, 대중은 코난 도일이나 아가사 크리스티에 열광했다. 한국의 추리문학은 계보가 그리 길지 않고 작가 기반도 상대적으로 약하다. 이런 상황에서 5만여 권의 장서 중 국내외 추리소설이 2만여 권에 이르는 추리문학관은 한국 문학사에서 추리문학의 계보를 형성하는 중심에 있다. 여기에서 한국 추리소설 문단의 김래성-김성종 뒤를 잇고자 추리소설창작교실도 정기적으로 열린다.
■추억…관광…힐링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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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리문학관 1층에서 5층까지 연결된 나선형 계단. |
추리문학관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도시철도 장산역에 내려 마을버스를 타면 추리문학관 바로 앞에 내려준다. 내리자마자 추리문학관 표지석이 눈길을 끈다. 여기저기 총탄 흔적이 나 있는 표지석은 관장의 아이디어다. 곁에서 총격전이 벌어진 듯하다. 문학관 안에 발을 들여놓으면 미스테리한 추격전 안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이보다 더 강렬하게 스릴과 서스펜스 분위기를 자아내는 독특한 곳이 있다. 문학관 1층에서 5층까지 연결된 계단이다. 계단이 톱니형의 원을 그리면서 감고 올라가는 나선형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시계의 태엽이 감기면서 아득한 비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1층에는 코난 도일, 애드거 앨런 포 등 귀에 익은 세계 추리문학 거장들의 초상화와 이력이 나열돼 있다. 이들의 시선을 감지하면서 2층으로 올라가면 다시 '셜록 홈즈의 방'을 만난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모자와 파이프, 홈즈의 피규어까지 이것저것 올려놓은 책상이 어지럽다. 어지러운 현장을 뒤적이며 단서를 찾으려는 홈즈를 만날 수 있을까.
세계 거장들의 사진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는 2층은 추리문학 작품이 주로 전시되어 있다. 최근 헤르만 헤세 문학관을 방문한 기록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2층은 대개 문학관에서 주최하는 강연이나 문화행사 위주로 이용되고, 특정한 프로그램이 없을 때는 3층과 함께 열람실로 개방된다. 3층은 빽빽한 서고와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는 책상이 차지하고 있다. 추리소설뿐만 아니라 일반 도서까지 빼곡히 들어찬 풍경은 여느 도서관과 같다. 구석구석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익숙하게 책을 펼치는 사람들은 초행이 아닌 듯하다.
3층의 압권은 뭐니뭐니해도 대형 창 앞에 펼쳐진 망망대해와 수평선이다. 이곳은 문학관이 아니어도 무수한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자리다. 마침 필자가 문학관을 방문했을 때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아이들과 방학을 맞아 부산 곳곳을 가 보기로 했어요." 부산 해운대구 반여동에 산다는 황재희 씨와 두 아이는 감천마을, 임시수도기념관 등지를 방문했고 다음 여정으로 추리문학관을 잡았다고 했다. 들어올 때부터 시끌벅적한 팀이 있다. 연신 사진을 찍는 폼이 관광객이다. 아니나 다를까, 서울에서 왔단다. 인근 호텔에 여장을 풀고, 해운대 관광길에 올랐단다. 추리문학관은 관광 코스 중 하나. 3층에서 바다가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감탄사가 멈추지 않는다. 말없이 창가에 앉아 수평선 너머를 응시하는 사람도 있다.
힐링의 기분이 든다는 최수훈 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전 학생 때 개인적으로 공부하러 종종 왔었어요. 직장 생활로 정신없이 살다가 몇 년 만에 왔어요." 조용하고, 책 읽기 좋고, 바다 보면 좋고…. 마치 오랜만에 고향에 온 사람의 대사 같다.
공간은 저마다 독특한 시간여행을 하게 한다. 누구에게는 관광이 되고, 누구에게는 추억이 되고, 누구에게는 절실한 생존이 되고, 누구에게는 힐링이 되고…. 이토록 다양한 얼굴이 추리문학관인 것 같다. '추리문학'이라는 특정 장르로 규정지었지만, 그 장르 밖으로 빠져나가는 무수한 미로가 있고, 이 미로 속에서 더 스릴 넘치는 쾌락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이 문학관이 놓여 있는 바다, 하늘, 안개로 수천의 얼굴을 갖는 언덕에 있다는 지리적 요인이 가장 큰 알리바이가 아닐까.
■관광 명소를 넘어 세계적인 책 마을로
추리문학관은 부산 사람보다 외지인에게 더 유명하다. 1층 북카페를 운영하는 직원에게 물어보니 부산 사람보다 외지인의 방문이 더 많다고 한다. 추리문학관의 입지적 조건은 도심 골목 주택가에 자리 잡은 요산문학관, 이주홍문학관과는 다르다.
부산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해운대해수욕장과 가까운 곳에 추리문학관이 문을 열고 있다. '바다가 보이는 도서관', '덤으로 즐기는…', '해운대 빠짐없이 즐기기', 'BIFF 주변 관광지', '영화와 영화 사이', '달맞이 길에서 만나는 명소' 등 관광 경로에서 언제나 만날 수 있다. 미포~청사포~구덕포~송정으로 이어지는 해운대~송정 간의 비경 속에 있는 달맞이 언덕은 울산 포항 태백을 거쳐 강원도 인제로 연결되는 대한 팔경 중의 하나인 31번 국도로 뻗어 간다. 특히 송정까지 가는 도중 길이 열다섯 번이나 굽어진다고 해서 일명 15곡도(曲道)로도 불린다. 최근 걷기 열풍에 힘입어 언덕 아래 달맞이·청사포 오솔길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이처럼 관광의 영역이 확장되고 있는 달맞이 언덕은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 독일 로렐라이 언덕과 종종 비교되면서 달맞이 언덕을 문화의 거리로 조성하자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김성종 관장은 "부산 해운대 달맞이 언덕을 영국 웨일스의 '헤이 온 와이' 같은 세계적인 책 마을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 책 마을의 출발점이 추리문학관이다. 그러나 관광의 공간이 현대 자본주의의 첨병인 것은 자명한 터, 관광의 한복판에 놓인 이 공간이 헤쳐나가야 할 안개다.
▶김성종
작가 김성종(1941~ )은 중국 산둥성 지난시에서 태어나 전남 구례에서 자라고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6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경찰관'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1976년 한국일보 추리장편소설 공모에 '최후의 증인'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추리소설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대표작으로 '최후의 증인' '여명의 눈동자' '제5열' '국제 열차 살인사건' 등이 있다.
문재원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인문한국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