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北 상상과 다른 폐쇄적 왕국
- 이데올로기 극복 '인간' 천착
- 역사소설가로 새 삶 살아

소설가 김하기(사진)는 역작 '완전한 만남'보다 예기치 않은 월북 사건으로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1996년 7월 부산의 동료 소설가들과 중국 옌볜 여행 중 사라진 김 작가는 두만강을 건너 입북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고 그의 이야기로 남북한이 한동안 들끓었다. 15일간 북한에 체류한 뒤 남한으로 돌아온 김 작가는 투옥됐다가 1998년 특사로 풀려났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기억은 희미해졌다. 그리고 김 작가가 그때 입은 상처에는 서서히 새살이 돋아났다. 그가 옛 기억을 찬찬히 더듬었다. 이제는 담담하게 바라볼 자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김 작가의 자기 고백을 담은 소설이 세상에 나왔다. 2002년 '복사꽃 그 자리'에 이어 11년 만에 내놓은 소설집 '달집'이다.

김 작가는 책에 실린 단편 '우물가의 여인'에서 자신이 화자로 등장해 월북 사건을 직접 언급한다. 월북 사건이 발생했을 때부터 많은 사람이 가진 의문이 하나 있었다. 당시 우기라서 물이 불어 두만강을 건너는 일이 쉽지 않았다. 어떻게 도강했는지는 미스터리였고 술에 취해 사라져버린 김 작가의 기억회로도 끝내 복원되지 않았다.

"난 당시 소위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마신 상태여서 두만강을 넘기 전 장면만은 백지처럼 하얗게 비어져 있었다." ('우물가의 여인' 중)

'우물가의 여인'은 끊어진 김 작가의 필름을 복구한다. 중국에서 온 한 여인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그 여인은 도강 직전 김 작가와 함께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 소설은 김 작가의 실제 경험을 그렸다. 어느 날 중국에서 온 남성이 김 작가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려 준다. 소설적 구성을 위해 남성이 여성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월북 사건은 김 작가의 세계관을 바꿨다.

"체류 기간은 보름에 불과했지만 내가 상상하던 곳이 아닌 데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작가의 눈에는 폐쇄적인 은둔의 왕국으로 비쳤다. 도강 이전에는 이념적인 글들을 쓰기도 했으나 도강 이후 이데올로기가 피곤하게 느껴지면서 역사소설을 주로 썼다." ('우물가의 여인' 중)

월북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힘이 작가에게 생긴 점은 소설 '북치는 소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소설에서 화자는 시인이자 문학기행 가이드로 나온다. 화자는 윤동주 문학기행을 갔다가 한 문인이 취중에 두만강을 건너 곤욕을 치른 경험을 털어놓는다. 김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객관화해 바라본 것이다.

9편의 단편소설이 담긴 이 소설집은 김 작가의 달라진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장기수나 남북문제 등 언제나 그가 천착했던 이데올로기가 사라지고 문학의 영원한 화두 '인간'이 대신 자리 잡았다.

김 작가는 뜨거운 시대를 살았다. 최근 영화 '변호인'으로 재조명됐던 '부림사건'으로 8년간 옥살이를 했고 월북 사건까지 겪었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 고백했듯이 그는 월북 이후 이데올로기의 울타리에서 벗어났다. 술·담배도 끊고 종교생활을 충실히 하고 있다. 작가의 임무는 굳건히 지키고 있다. 스스로 '글의 노예'라고 표현할 만큼 글쓰기에 파묻혀 산다. 지난해 6월부터 한 언론사에 연재소설 '海帝어둔'을 싣고 있다. 어둔은 조선시대 독도를 지킨 울산 어부 박어둔을 말한다. 역사소설에 매진하겠다는 작가의 각오를 느낄 수 있는 모습이다.

김 작가는 "이번 소설집은 혼란스러웠던 나 자신을 정리한다는 의미가 크다. 앞으로는 역사소설에 집중해 과거를 통해 현재를 조명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