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의 상설 전시작품 중 하나인 미국 설치미술가 제임스 터렐의 'Blue Planet Sky' 내부에서 한 여행객이 뻥 뚫린 하늘을 보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빛의 느낌을 고스란히 인지할 수 있는 이 작품 속은 특히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약속 장소로 애용된다고 한다. 이승렬 기자

세계는 글로벌화의 진전에 따른 산업구조의 재편으로 경제난이 지속되고 안전해 보이던 도시마저 재정적 위기에 맞닥뜨리고 있다. 이런 현실은 많은 국가와 도시에도 또 다른 자각을 가져다주었다. 이른바 굴뚝산업 중심의 하드웨어 시대에서 창조적 지식 산업 중심의 소프트파워 시대로 전환되고 있다는 자각이다. 소프트파워를 대표하는 분야로 문화예술 및 문화예술교육이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본지는 다섯 차례에 걸쳐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지역 활성화를 이룬 국내외 선진 사례를 소개하고 부산의 향후 지향점을 살펴보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 문닫은 공장 개조해 만든 '예술촌'
- 연중무휴 24시간 누구나 이용케

- 대부분 전시 무료 '21세기 미술관'
- 매년 150만 명 이상 꾸준히 찾아

- 예술인 수십 명 입주 '창작의 숲'
- 전통공예 체험장·휴식처로 각광

- 놀고있던 건물 활용 시민에 개방
- 지역경제 활성화 동력으로 작용

가나자와(金澤) 시는 일본 혼슈의 중서부 지방에 위치한 이시가와(石川) 현의 행정·교육·문화 중심지다. 동해에 면한 인구 45만여 명의 도시지만, 항구도시의 이미지보다는 문화예술과 교육에 특화된 도시로 명성이 높다. 16세기 후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 가신이었던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가 가나자와 성에 입성한 이후 본격적으로 도시가 조성됐다. 일본 국내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가가유젠(염색), 금박 등의 전통 공예 기술과 다도 등 수많은 격조 높은 전통문화가 꽃을 피웠다. 하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도쿄 오사카 등에 비해 공업화가 늦어지면서 한동안 침체기를 겪었다.

그런데 최근 가나자와가 세계적인 관심을 끄는 문화예술교육 중심 창조도시로 부활하고 있다. 2009년 6월 일본 최초로 유네스코 창조도시 네트워크(크래프트&포크 아트 부문)의 일원이 되었다. 1996년 조성된 시민예술촌과 2004년 문을 연 21세기 미술관, 2003년 개소한 창작의 숲 등 3대 문화예술 관련 시설이 높은 평가를 받은 덕분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일찍이 '보존에서 창조로'를 기치로 문화예술과 환경의 중요성에 주목한 행정기관의 정책과 시민적 합의가 존재하고 있다. 묵은 공간을 재활용해 새로운 창조적 공간으로 재탄생시켰고, 그 목적은 오로지 시민 행복도시를 만들겠다는 일념이었다. 그것이 외부에 알려져 명성을 얻고 지역 활성화의 기폭제가 된 것은 역설적이다.

■100년 된 방직공장-시민예술촌

	시민예술촌.

가나자와의 약진 계기는 1996년 문을 연 '가나자와 시민예술촌'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취재진이 찾아간 시민예술촌의 첫인상은 탁 트인 열린 공간이다. 축구장 2개를 합친 것보다 넓은 잔디밭과 붉은색 벽돌 건물, 그리고 그 앞의 연못이 눈에 들어온다. 공원인지 예술촌인지 헷갈릴 정도다. 호쇼 유타카 촌장은 "1993년 당시로써는 100년 이상 건재했던 방직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이 부지를 시 정부가 사들여서 어떻게든 활용해야 한다는 시민 여론이 일었고, 시 정부와 시민이 머리를 맞댄 결과로 3년여의 기간을 거쳐 시민예술촌이 탄생했다. 어찌 보면 모험이었다"고 말했다.

4동의 창고 건물은 각각 드라마 공방, 뮤직 공방, 에코라이프 공방, 아트 공방으로 구성돼 있다. 중간에는 야외 콘서트와 전시회 등을 할 수 있는 '오픈스페이스'를 넣었다. 운영방식도 특이하다. 낮에 일하는 시민도 심야에 사용할 수 있도록 연중무휴 24시간 개방을 원칙으로 운영된다. 관리와 운영은 시민으로 구성된 가나자와예술창작재단에서 전담한다. 촌장도 이 재단에서 선출한다. 예술 관련 동아리의 연습 및 공연, 전시가 가능하고 어린이 예술 교육 및 체험도 이뤄지며 노년층의 문화예술 공간 역할도 한다. 관리 운영비는 이용료 10%를 제외한 나머지를 시 예산으로 부담한다.

이 시민예술촌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개관 후 6개월간 10만 명의 시민이 참가했고, 이후 5년간 이용자 수가 100만 명을 넘겼다.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간 240만 명이 이용했다. 일본 전역과 해외에서까지 찾아온다. 유타카 촌장은 "시민들이 참여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다. 외지인들도 많이 오는데 그것이 도시의 활력으로 확대 재생산된다"고 말했다.

■'21세기 미술관'-시민과 함께하는 공간

가나자와 시청과 가나자와 성 및 일본 3대 정원 중 하나인 겐로쿠엔(兼六園) 인근, 즉 시내 중심부에 자리 잡은 '21세기 미술관'은 문화예술 창조도시 가나자와의 현대적 랜드마크이다. 초·중·고교가 이전한 자리에 2004년 토지 구매비 포함 200억 엔을 들여 완공한 이 미술관은 지난해까지 이미 328억 엔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만들어 냈다. 개관한 지 1년 만에 시 인구의 3배를 훨씬 넘는 157만 명이 방문하기도 했으며 매년 150만 명 이상이 꾸준히 찾는 곳이다.

미술관 형태부터 특이하다. 완전하게 둥근 원형의 납작한 건물은 외벽을 모두 120장의 대형 유리를 연결함으로써 안팎의 경계를 허물었다. 동서남북 4개의 출입문은 건물의 앞뒤를 없앴다. 공동 설계자인 세지마 가즈요와 니시자와 류에는 이 건물로 2010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상을 받았다. 경계와 정형을 허문 개방성이 특징인 이 건물 자체가 하나의 걸작품인 셈이다. 그래서 전 세계 건축학도들이 몰려들고 있기도 하다.

오치아이 히로아키 홍보실장은 "이 미술관은 현대미술관이면서 동시에 학생들의 작품 발표의 장이 되거나 미래를 이끌어갈 초등학생들을 위한 예술문화교육활동의 장이기도 해, 문화 창조의 중심거점으로 기능하고 있다. 지역의 초등학생은 4학년 때 누구나 필수적으로 미술관 체험을 하도록 교육과정이 구성돼 있다"고 말했다. 제임스 터렐을 비롯한 수많은 세계적 현대 미술가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며 대부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유료로 운영되는 특별전은 1년에 4, 5회 열린다.

전시회 존(Zone)뿐만 아니라 누구나 이용 가능한 도서관, 카페 등이 있는 교류 존도 많은 방문객이 찾는다. 밤 10시까지 무료 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

■'창작의 숲'-예술가들의 레지던시 공간

	창작의 숲 전경.

시가지에서 차를 타고 동남쪽으로 30분 정도 가면 닿는 유와쿠온천 인근 언덕에 '가나자와 창작의 숲'이 있다. 9만 ㎡ 규모의 이 공간은 오래된 일본 전통 여관 건물을 재활용한 곳으로, 숙소와 사무동 등이 자리한 본관 건물 외에도 4개의 공방 건물과 1개의 세미나건물이 호젓한 숲과 조화를 이룬다. 모든 건물이 100년 이상 된 지역 전통 가옥을 옮겨놓은 것이다.

이곳은 가나자와 지역의 젊은 전통 공예 예술인 수십 명이 수개월에서 1년 이상 입주해 작품을 창작하는 공간이다. 이와 함께 시민의 가족 또는 동아리 단위의 숲 속 문화 체험 및 전통 공예 체험장의 역할과 아웃도어 휴식공간 및 세미나 공간의 역할도 하고 있다. 물론 운영은 모두 시민 자생 조직으로 운영된다. 구로자와 신 소장은 "연간 2만여 명이 이용한다. 입주한 젊은 전문예술인에게는 소액이지만, 창작 지원금까지 지원되고, 이들이 때대로 시민과 어린이들에게 강사 역할을 해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 가나자와 시 문화정책과장 도기시 유타카 씨 인터뷰

- 미술관 등 문화예술 시설 조성, 많은 수익 남기기 위한 것 아냐
- 단지 관광객 유인 매개체일 뿐

-가나자와 시의 중점 문화정책부터 간략히 설명해달라.

▲시민이 문화와 예술을 누리고 즐김으로써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역점을 둔다. 크게 5개 부문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문화예술 발전에 현저한 공헌이 있는 사람에 대한 표창, 새로운 문화 창조, 에도시대부터 쌓아온 면면한 지역문화의 진흥을 위한 방안 마련, 행정뿐 아니라 여러 시민단체를 돕고 활성화하는 문화사업의 조성, 시설관리 등이다.

-현재 기준으로 시민예술촌과 창작의 숲, 21세기 미술관 등이 지역 경제 활성화에 미친 영향은.

▲2010년 현재 가나자와를 찾는 관광객 수가 815만 명가량이다. 시 인구가 45만 명 정도이니 20배 가까운 관광객이 오는 셈이다. 시는 관광명소 방문에 문화예술 명소 방문과 창작 체험을 조합시킨 코스를 만들어 '크래프트 투어리즘' 정책을 펼치고 있다. 지역에 활력이 돌고 있다.

-아직은 투자 대비 수입이 적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도 가나자와의 문화행정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1990년부터 20년간 재임한 전 시장의 생각을 대신 전하고 싶다. 그는 '문화에 투자하지 않는 도시는 미래가 없다'고 했다. 문화예술 시설들은 그 자체 입장료 관람료 등으로 이익을 많이 거두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도시를 방문하게 하는 매개체일 뿐이다. 사람이 오면 도시에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된다. 문화는 도시의 매력과 활력의 원천이라는 생각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한다. 2015년 도쿄-가나자와 간 신칸센이 개통된다. 2시간이면 올 수 있다. 가나자와가 또 한 번 도약할 기회다.

-앞으로 정책 방향성 및 전망은.

▲지역 대학생들로 구성된 문화예술 시설 및 아이디어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 추진 등 인재의 육성, 문화의 비지니스화 정책 강화, 세계로의 약진 등을 주요 정책 방향으로 설정하고 있다.

일본 가나자와=이승렬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