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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왼쪽)과 순종. 격변의 시기를 살았던 고종은 내외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근대국가로 나아가려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국제신문DB |
- 국서 없애고 양국 관리 직접 왕래
- 통신사행 비해 외교적 위상 격하
- 실무형 관리 선발 등 日 요구 반영
- 日 제공한 증기기관선 타고 이동
- 새 여정방식 세계정세 관점 바꿔
- 중화 벗어나 새 국제질서 편입
- 급변하는 정세 민첩한 대응 못해
- 기형적 외교형태로 전락해 단명
■증기기관선으로 일본에 간 수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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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조약의 전권대사격인 조선의 신헌(왼쪽)과 일본의 쿠로다 키요다카 |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조선 측 대표로 교섭에 임한 신헌은 조약체결 직후 고종에게 다음과 같이 복명하였다.
고종: 이제부터는 국서를 없애는 것인가?
신헌: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의정부와 저들의 태정부, 그리고 예조와 외무성이 서로 왕복하기로 굳게 약정했습니다.
고종: 또 아뢸 말이 있는가?
신헌: 쿠로다 키요다카(黑田淸隆)의 말에, 6개월 안에 즉시 사신을 보내 한편으로 회사(回辭)하고 한편으로 그 풍속을 채탐하며 또 한편으로 유람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부산에서 아카마가세키(赤間關)까지는 화륜선을 타고, 아카마가세키에서 도쿄까지는 7~8일이면 도착할 수 있으니 별반 노고가 없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고종: 그러면 이는 통신사를 보내는 것인가?
신헌: 관직품계의 상례에 구애받지 말고 다만 일을 아는 사람을 보내라 합니다. 이제부터 피아의 사신은 모두 예폐를 없애고 저곳에 가면 방세를 주고서 거처하고 밥을 사서 먹으니, 이것은 통신사와 다른 점입니다.(신헌, '심행일기(沁行日記)' 중에서)
조선통신사를 대신해 새롭게 일본을 다녀올 수신사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선명하게 말해주는 대목이다.
먼저 국서를 없애고 조선 조정과 일본 내각이 직접 왕래한다는 것은 대마도의 외교업무를 폐지한다는 뜻이다.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은 대마번을 폐지하고 외무성이 직접 대조선 외교를 담당하게 하면서, 종래 조선-대마도의 관계를 사사로운 관계로 규정하였다. 이는 조선 조정과 에도막부 간 이루어진 통신사행의 외교적 위상을 격하 또는 부정한 것이다.
다음, 사행의 선발에서 벼슬의 품계와 상관없이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 꾸린다는 합의는 각종 조약체결에 적합한 실무형 관리가 필요했던 일본 측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다. 겉으로 보면 매우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이라 할 수 있지만, 이는 자국에 우호적인 인물을 포섭하려는 일본의 포석이었다. 또한 모든 의례와 폐물을 없애고 숙식을 자국의 비용으로 충당한다고 바꾼 것은 에도 지식인들이 조선통신사를 접대하면서 국고를 낭비하니 축소 내지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한 이른바 의례개혁 논쟁이 결국 수신사에 이르러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일본에 간 수신사는 종래 통신사와 비교하여 견문과 여정 방식이 크게 바뀌었다. 쿠로다 키요다카가 말한 화륜선은 사행의 전반적 방식이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조선통신사가 타고 가던 목선 대신 일본이 제공한 증기기관선이 조선의 사절을 태우고 오가면서 안전성이 크게 개선되었으며, 사행의 왕환기간이 짧아질 수 있었다. 1차 수신사의 정사인 김기수는 '일동기유'에서 "대마도는 종전에도 사신이 반드시 지나가던 곳인데, 이번 걸음은 큰 바다를 배로 건너가게 되니, 가끔 나타나는 섬은 전연 관계없이 지나가버린다"라고 화륜선이 바꾼 여정을 잘 기록해두었다. 이것은 단순한 여정방식의 변화에 머문 것이 아니라 일본은 물론 세계정세에 대한 관점을 총체적으로 바꾸는 데 영향을 끼쳤다.
■문화 수용자로 바뀐 수신사
수신사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보다 조선통신사의 문화 시혜적 입장이 수용자적 입장으로 뒤바뀐 것이다. 도쿄는 일본과 서양의 근대문물과 세계정세를 이해하고 그곳에 와 있는 서양 각국의 공사를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심지어 중국의 관료까지 여기서 만났다. 이런 상황에서 문사 교류나 필담이 축소되거나 없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무엇보다 수신사는 조선이 중화질서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국제 질서에 편입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징표이다. 강화도조약의 체결을 기점으로 조선의 대외관계가 근본에서 재편되었다.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알려진 대로 조선의 청나라에 대한 사대 관계를 끊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선점하려는 데 있었다.
흔히 외교를 가리켜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한다. 전쟁도 전략이 있어야 하듯 외교도 분명한 목적과 노선이 있어야 한다. 조선 시대에는 사대교린이라는 분명한 외교노선이 확립되었다. 교린은 본질에서 비왜, 즉 왜를 방비하여 평화를 수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처럼 노선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그 나름의 효력이 지속한 것이다. 반면 수신사는 변화된 정세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일본의 의도대로 수행된 매우 기형적인 외교형태로 전락하여, 결국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방대한 조선통신사의 유적과 기록을 유네스코 유산으로 공동 등재하고 한일 신실크로드를 열어가려는 지금, 조선통신사와 수신사에서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점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 이에 대한 뚜렷한 목적을 세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아울러 평화 교류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두 나라의 진정한 합의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 "서양 종교 막되 기계는 배워야" 조선 진로 모색
■ 고종의 동도서기론
- 수신사·조사시찰단 보낸 근거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일본과의 전통적 교린 관계가 해체되고 불평등한 관계가 심화하여 갔다. 수신사도 일본의 강압에 가까운 요구로 다녀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온전히 일본의 의도에 의해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조선도 그 나름의 의도를 가지고 1876년부터 1882년간 네 차례 수신사를 일본에 보냈다. 이와 별도로 오로지 일본을 관찰할 목적으로 1881년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 12명의 관리를 조사시찰단의 이름으로 보내기까지 했다. 이를 통해 조선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했다.
고종은 1882년 8월 5일, 그러니까 마지막 4차 수신사행이 출발하기 전 전교를 내리는데, 그 핵심은 대원군이 집권 시절 전국 각지에 세운 척양비를 뽑아버리라는 명이다. 그러면서 고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대 쪽에서 화의를 가지고 왔는데 우리 쪽에서 싸움으로 대한다면 천하가 장차 우리를 어떤 나라라고 할지를 어찌하여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 그들의 종교는 배척하고, 기계를 본받는 것은 진실로 병행하여도 사리에 어그러지지 않는다. 더구나 강약의 형세가 이미 현저한데 만일 저들의 기계를 본받지 않는다면 무슨 수로 저들의 침략을 막고 저들이 넘보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안으로 정교(政敎)를 닦고 밖으로 이웃과 수호를 맺어 우리나라의 예의를 지키면서 부강한 각 나라들과 대등하게 하여 너희 사민들과 함께 태평성세를 누릴 수 있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고종실록' 19년 8월 5일)
요지인즉 서양 각국과 수교하는 것은 조야가 주장하듯 사교를 받아들이는 것과 다른 문제이며 그들의 종교는 막아야 하지만, 그들의 이로운 기계는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인데, 이것이 이른바 '동도서기론'이다. 여기서 우리는 곧 고종이 수신사와 조사시찰단을 보낸 핵심적 근거 중 하나를 찾을 수 있다. 비록 나라의 정치가 어지럽고 외세의 간섭이 극심해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국제질서에서 조선이 나아갈 바를 모색했던 노력은 평가할 만하다.
정훈식 부산대 강사
※공동기획: 부산문화재단, 조선통신사학회, 국제신문
※협찬: 한국수력원자력(주)고리원자력본부, YK Steel(주)
※후원: 누네빛안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