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조선시대 짚신. |
우리나리 전통민속 신발 가운데 문무백관의 신발인 화자, 의례용인 목화, 국상 때 신는 백화, 사대부가의 남자용으로 태사혜, 사대부가의 부인용으로 운혜, 녹비혜, 조복과 제복에 신는 흑혜, 비오는 날 신는 진신, 사대부가의 여인이 신는 당혜 등은 주로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서민이 신었던 짚신은 볏짚으로 가는 새끼를 꼬아 날을 삼고 신총과 돌기총으로 울을 삼아 만들었다. 삼이나 왕골, 부들, 피나무 껍질, 칡덩굴을 사용하기도 했다.
짚신의 기록은 통전 변방문 동이 마한조에 '초리(草履)'가 나오는데, 신라의 마리전은 관서로 내성에 소속되어 초리(짚신)를 생산하는 곳이다. 진서 사이전 마한조에도 초교(草轎)가 나오기에 삼국시대 때부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짚신의 종류는 왕골총백이, 부들총백이, 까라백이, 고운신, 막치기가 있다. 총백이는 짚신의 총의 재료를 나타내고 있고 까라백이는 짚이다. 만드는 재료에 따라 짚신(짚세기), 고운 짚신, 엄짚신, 부들짚신, 왕골짚신, 미투리, 삼신, 탑골치, 청올치신(칡의 속껍질로 만든 신) 등이 있고 별칭도 다양하다. '성호사설유선'에는 왕골신이나 망혜는 가난한 사람의 신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운신은 여자용이고 막치기는 남자의 짚신이다. 목이 긴 장화처럼 생긴 둥구니신도 있다.
짚신의 뒤갱기를 감는 재료는 피나무, 닥나무, 옥수수, 뽕나무, 삼, 싸리나무, 가래나무 껍질과 칡덩굴의 속 줄기 등 다양하다. 이 같은 재료는 뒷갱기가 힘을 많이 받고 마찰도 심한 부위이기 때문이다. 짚으로 하면 약하고 쉽게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짚 보완용으로 뒷갱기를 감는데 사용된다. 짚신에는 신총, 앞갱기, 뒷갱기, 돌기총 2개(5㎝), 도갱기(8㎝), 신날, 바닥, 뒤축, 앞축 등 부위에 따라 용어가 따로 있다.
짚신과 미투리의 차이는 짚신은 4줄의 날이고 마혜 또는 마구라고도 하는 미투리는 6줄(8줄도 있음)의 날을 사용한다는 것에 큰 차이가 있다. 보통사람은 미투리를 삼으로 만든 것을 미투리라고 한다. 삼으로 만든 것은 삼신이고 예전에 삼으로 6줄의 날을 미투리를 많이 만들어 신었기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짚신 만들기를 할 때는 고정줄, 짚모순, 부띠(허리띠), 짚신틀, 다리기, 토꼬지, 덩두렁 막개 등 또 다른 용어가 있다. 짚신을 만들려면 고정줄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고정줄은 짚신의 골격을 말한다. 줄은 튼튼하여야 하므로 재료로 짚뿐만 아니라 삼이나 닥나무껍질을 섞어서 꼬아 고정줄이 튼튼하게 하여야 한다. 고정줄은 짚신을 만들기 쉽게 하려고 줄 다듬기를 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고정줄의 표면 상태를 칼이나 가위로 다듬고, 그 뒤에는 버린 지푸라기로 고정줄의 표면을 대고 몇 번의 왕복을 하여 줄의 표면상태를 매끄럽게 하여야 한다. 나중에 짚신 다리기에 지장이 없게 하기 위함이다.
짚신을 만들려면 짚 2개로 아주 가늘게 꼰 가는새끼와 고정줄을 허리춤에 연결하여야 하는데 이때 고정줄을 반으로 접어 허리춤에 매고 나머지 두 고리는 양쪽 무릎을 구부린 곳에 끼워서 작업한다. 고정줄은 양쪽 무릎에서 시작하여 양쪽 발바닥 중앙(장심), 양쪽 엄지발가락에 끼워가는 단계를 거치면서 작업한다. 물론 짚신 짜는 틀을 사용하면 이 신체 부위의 과정은 없어진다.
짚신 만들기는 다른 짚풀용구 만들기보다 공정이 까다롭다. 짚을 가리고 새끼를 꼬고 허리에 줄을 매고 4줄로 날로 하여 양쪽에 가장자리에 총을 만들고 가는새끼로 총과 돌기총을 꿰어 신골을 넣어 '덩두렁막개'로 두드려 부드럽고 보기 좋게 모양을 내어 만든다. 신골은 짚신의 마무리 단계로 짚신의 크기와 모양을 낼 때 짚신의 안쪽에 넣어 사용하는 나무토막을 말한다.
신골의 종류는 앞골, 배족, 뒷골이 있다. 앞골은 짚신의 앞쪽에 사용하고 배족은 중앙에 뒷골은 짚신의 뒤꿈치 부분에 넣어 사용한다. 짚신에서 여자용은 곱거나 부드럽게 만들어 사용하였다. '짚신도 제 짝이 있다'. 짚신의 새 신을 신을 때는 왼쪽 오른쪽의 구분이 없다. 누구나 짝이 있고 살면서 맞추어 가면 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신발은 사용 용도와 신분에 따라 종류가 많음을 살펴보았다. 짚신만 보아도 신라 시대 때부터 담당관청의 관련 부서와 지위가 있었다. 신발산업과 이에 따른 문화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기능성이나 예술성이나 실용성을 가미하여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여기서 1970, 80년대 부산을 먹여 살렸던 신발산업을 생각해본다. 한때는 부산 사상구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신발 공장이 있을 정도였다. 부산에서도 미국의 '뉴욕신발엑스포'처럼 신발만을 위한 축제가 생길 법하다.
권민수 한국민속문화원 이사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