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적으로 말하면 돈, 조금 고상하게 부르면 화폐는 인간 발명품 중 최고 가운데 하나다. 교과서에 화폐는 교환 매개 수단, 가치 척도 기능, 가치 저장과 투자 수단 등 다양한 역할을 한다고 소개돼 있다.
그것뿐만 아니다. 물질문명이 자리 잡으면서 돈은 부의 상징이 됐고 한편으로는 경제 정책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된다. 경제가 어려우면 경기를 부양시키기 위해 중앙은행이 시중에 돈을 푼다. 최근 몇 년 동안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시행했던 양적완화가 여기에 해당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돈을 쫓지만, 정작 돈은 우리 주위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당장 지갑을 열어보자. 예전에 지폐가 차지했던 공간에 신용카드가 끼워져 있다. 현재 우리에게 돈은 은행 잔고, 카드 명세서에 찍혀 있는 숫자로 인식된다.
이런 상황에서 돈의 의미를 되새겨 볼만한 책 화폐 이야기가가 나왔다. 제목만 보면 단순히 전 세계 돈의 역사 등을 소개하는 흥미위주의 책으로 치부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성격이 다르다. 7명의 공동 저자가 모두 기획재정부 고위 공무원인 점부터 눈에 띈다.
이들 저자는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기재부 국제금융국에서 함께 일한 경험을 공유한다. 이후 비슷한 시기에 파견 또는 유학 차 영국 런던에 머무르다 화폐에 관한 글을 쓰기로 의기투합해 책을 냈다. 그래서 책의 내용도 색다르다. 학자가 쓰는 딱딱한 경제 이론서도 아니고 시장에서 현장을 경험한 실물 경제인의 사례 위주 내용도 아니다. 이론과 현장의 중간쯤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뜻밖에 쉽고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사건 등을 소개해 흥미롭게 읽힌다.
총 8개의 장으로 이뤄진 이 책에는 화폐의 역사부터 지폐가 금속 화폐를 누른 계기, 화폐를 바탕으로 발전한 금융,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중앙은행인 영국의 영란은행 역사, 영국 파운드와 미국 달러가 기축 통화를 놓고 벌인 한 판 승부 등이 담겨 있다. 관심을 끄는 대목은 경제학의 시조 애덤 스미스와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 케인스가 바라보는 화폐에 대한 시각이다. 특히 통화 정책보다 재정 정책을 펼쳐 화폐와 전혀 상관 없는 것으로 여겨지던 경제학자 케인스가 사실 화폐 정책의 달인이었다는 점은 이채롭다.
저자는 전쟁이 새로운 화폐를 등장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설명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BC404)으로 아네테가 은화 외에 동화와 금화를 주조했으며 영국의 웰링턴이 이끈 연합 동맹군이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격파한 뒤 지폐가 금속화폐보다 우위를 점하게 됐다. 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달러가 파운드를 밀어내고 기축통화로 자리잡았다.
책 곳곳에서 소소한 재미도 찾을 수 있다. 주화의 둘레에 왜 톱니모양을 새겼는지, '오즈의 마법사'가 사실은 20세기 초 금 본위제를 채택하던 미국이 서민을 위해 은 본위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는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과학자 뉴턴이 영국 왕립 주조국의 수장으로 일하면서 화폐 발전에 기여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인류가 발명한 것은 화폐라는 이름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신뢰를 묶어 내는 기술이었기 때문에 화폐의 본질은 '신뢰'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경제 정책을 수립하는 입안자들답게 경제 정책을 통화량이나 이자율에 의존하지 말자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