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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64년 병고(兵庫) 입항도('대계 조선통신사' 7권, 명석서점, 1994에서 인용). 오늘날 고베 지역이다. 배 세 척에는 정사, 부사, 종사관의 배임을 알리는 깃발이 있다. |
- 제술관 신유한이 쓴 사행록
- '풍월만 읊고 세상 흐름 몰라'
- 실학자 정약용 신랄한 비평
- 1763~64년 통신사 배우는 자세
- 정사 조엄, 고구마 적극 도입
- 선박·수차기술 등 기록하게 해
- 조선서 실제 사용방안 모색
- '일관기' '화국지' 등에 수록
■정약용의 질책
중국으로 가는 연행사로 뽑혀 고금의 온갖 문물과 책이 쌓여있는 베이징의 유리창 거리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은 조선 지식인의 선망 그 자체였다. 연암 박지원이 우연한 기회에 연행사 일원이 되지 않았다면 유명한 '열하일기'는 탄생할 수 없었다. 또한 북학파가 그렇게 중국의 문화를 소개하고 모방하고 흠모한 것은 조선의 문화를 재구성해 보려는 욕망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중국으로 가는 연행길은 늘 북적거리고 요란하였다. 이와는 달리 험한 바닷길 탓에 산목숨으로 돌아오지 못할까를 걱정하고, 원수의 나라에 가는 굴욕감으로 가득했지만, 일본에서는 꼿꼿하게 한 수 가르쳐준다는 자세를 보인 통신사. 이런 통신사에게 신랄한 비평을 던진 이가 정약용이었다. 1719년 통신사 제술관이었던 신유한(申維翰)이 쓴 사행록에 대한 것이었다. 비평 내용을 살펴보면 대략 '신유한은 오직 풍월을 읊으면서 호기를 부리는 시인일 뿐이다. 외국에 사신으로 갔으면서도 사방이, 천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남에게(일본인들에게) 기만을 당했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이다. 일본인들이 글 잘한다, 유식하다고 말해주는 것에 익숙해서, 정작 진짜 일본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는 평가일 것이다. 그러나 신유한이 일본의 문화와 사회에 무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쓴 '해유록'에는 일본에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적은 '문견잡록(聞見雜錄)'이 실려 있다. 그가 오사카를 갔을 때 본 출판문화는 부러움 그 자체였다. 다만 실학자 정약용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부러워하는 데에만 그친 신유한이 눈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기록되는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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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력신사기록(寶曆信使記錄)'속의 배다리 그림. 1764년 일본에 도착한 통신사들이 강을 건널 때 이용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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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통신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통신사 중에서 일본을 '기록하고', '배우는' 자세를 자주 보인 것은 1763~64년 통신사들이었다. 일본을 제대로 알고, 대처할 것은 대처하고, 배울 것은 배우자는 취지로 기록을 남겼다. 18세기 실학의 바람이 주효했다. 이 사행의 수장인 정사 조엄은 조선의 흉년을 극복할 고구마를 적극 도입하고, 일본의 선박과 제방 기술, 수차와 방아 기술을 눈여겨보고, 제작된 방법을 그리거나, 기록하도록 하고, 일본 지도도 그리게 하는 등 조선에서 실제 사용하는 방안들을 모색하였다. 정사의 노력은 같이 간 제술관 남옥(南玉)이 쓴 '일관기(日觀記)', 서기 원중거(元重擧)가 쓴 '화국지(和國志)'와 '승사록', 서기 성대중(成大中)이 쓴 '사상기'와 '일본록(日本錄)'에 보다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관기'는 춘, 하, 추, 동으로 나뉘는데 통신사가 알아야 하는 범례는 춘에, 사행 일기는 하와 추에 실었다. 주목되는 것은 동에 '총기(總記)'를 실었는데, 즉 일본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담은 총체적인, 알아 두어야 할 것에 대한 기록이었다. 원중거와 성대중은 매일 쓰는 사행일기 외에 일본견문과 지식, 정보가 수록된 '화국지'와 '일본록'을 남겼다. 일본의 지형·지세, 최고권력자의 계보, 역사, 풍속, 물산, 종교, 학술, 각종 제도를 총 망라한 종합 정보학술서였다. 사행일기인 '승사록'과 '사상기'에도 일본 관련 정보를 상세히 수록하고 있다.
이들 책 속의 몇 가지 기록을 통해, 일본을 알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꼼꼼하게 기록하였는지를 살필 수 있다. 우선 일본 배에 대한 기록이다. 조엄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 속에도 배 이야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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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객인상필화(韓客人相筆話)'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 실린 조엄. |
통신사 여정 중에 자주 발생하는 사고는 선박과 관련되어 있어, 선박에 관한 관심이 높았다. 항해 시간이 길고, 해협을 건너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선박이 파도에 밀려 표류하거나, 바람에 치목(방향조절하는 키)이 부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남옥은 '일본 배는 돛에 다는 돛포로 반드시 면직물을 쓰고, 배보다 넓게 만들어서 바람을 받게 한다', '배가 지극히 가볍고 견고해서 틈이 없고, 헝겊을 사용하지 않아도 새지 않는다'고 하였다. 원중거는 '배의 정교함은 천하에 일본만 한 곳이 없다'고 하였다. 심지어 '임진왜란 때 중국을 침범하기 위해 조선을 업신여긴 것은 그들의 배와 조총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일본 배의 단점도 있으니 잘 선택해야 한다는 평을 기록하였다. 무엇을 배울 것인가,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강조하는 대목이다.
조엄이 본 수차에 대해서도 제각각 기록을 상세히 해두었다. 남옥은 인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성 밖의 물을 저절로 성 안 물길로 보내는 수차의 구조를 정밀하게 기록하였다. 원중거는 '큰 홈통을 끌어내어 밖에 수차를 매달아 물속에 세웠는데 제도가 물레와 다름이 없다'로 시작되는 수차에 관한 설명은 수차 바큇살이 몇 개인지, 나무와 나무를 결합해 수차를 만든 구조, 물이 흘러가는 물통의 구조와 방향까지 자세히 기록하여, 그날 일기의 반을 차지하였다. 금방 모형을 만들어도 될 정도의 기록이다. 그런데도 원중거는 '멀리서 바라보아서 그 대략만 안다'고 할 뿐이었다. 당시 일본에도 손이나 발을 사용해서 물을 대는 답차(踏車), 소차(小車)가 있었는데, 규모가 크고 당시로써는 최신식의 자동 수차에 대해 너도나도 신기해했고, 이것을 조선에도 써 볼 요량이었다. 이는 1711년 통신사 서기 남성중(南聖重)이 '저 이상한 기계를 보는 것도 기묘한 유람거리'라고 치부한 것과는 사뭇 다른 자세이다.
# 통신사 박서생의 기록
- 일본인 청결·위생 눈길
- 조선 의료기관에 욕탕, 상점 진열대 설치 주장
일본 여행을 하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도시, 농촌을 가리지 않고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일본의 깨끗함은 이미 600년 전의 통신사 박서생(朴瑞生)의 눈에도 선명하게 들어왔다. 1429년 6월 박서생을 정사로 한 통신사가 일본 교토(京都)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일본에 파견된 그간의 많은 사절단과 이번 사절단이 다른 것은 다녀온 후 박서생의 보고서 내용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 일본에서 본 것을 조선에서 시행했으면 하는 것들이었다.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일본의 청결과 위생이었다. 노소 구분 없이 목욕을 좋아하고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을 좋아해서 큰집에는 저마다 욕실이 있고, 욕실을 갖추지 못하는 일반 백성은 마을 여러 곳에 설치된 욕탕에서 목욕한다고 전하고 있다. 그는 조선에도 제생원, 혜민국(혜민서)과 같은 서울의 의료기관, 지방의원과 광통교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욕탕을 설치하자고 주장하였다.
일본의 시장에 상품이 청결하게 진열된 것도 본받자고 하였다. 그가 본 일본 상점은 저마다 '미세다나(見世棚)'라고 불리는 진열대를 만들어, 상품을 진열하기 때문에 먼지가 없고, 사는 사람도 쉽게 물건을 보고 거래하는 모습이었다. 반면 조선의 시장은 말린 것, 물기가 있는 것 상관없이 고기와 생선 등 식품을 모두 진흙 위에 두고 때로는 그 위에 앉고 심지어 밟기도 하는 모습이었다.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지만, 당시 정리정돈에 약한 조선 시장의 복잡한 모습을 기록하였다고 생각된다. 상점마다 선반을 칸칸이 만들어 어느 칸에는 무슨 물건을 파는지 이름표를 달면 깨끗하고 편리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일본의 청결과 위생만 거론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불교를 숭상하니 불교를 통해 일본과 더욱 친해질 수 있다는 일본과 사귀는 방법, 사람의 힘을 쓰지 않고도 돌아가는 수차 사용법, 무거운 현물 거래가 아닌 간편한 화폐 사용법, 강에 교량을 건설하여 왕래를 용이하게 하는 법도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의 보고는 '우리 백성을 잡아가는 왜적들을 응징하는 방법'으로 끝났다.
김동철 부산대 사학과 교수·한국민족문화연구소장
※공동기획: 부산문화재단, 조선통신사학회, 국제신문
※협찬: 한국수력원자력(주)고리원자력본부, YK Steel(주)
※후원: 누네빛안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