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게 소금과 풀은 생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다. 소금과 풀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와 궤를 같이해왔다. 우리 역사에서도 소금의 가치는 각별했다. 조선은 각 지역의 소금 생산장인 염분을 분류, 목록화하고 관리하였다. 이렇게 관리된 소금은 쌀이나 포로 바뀌어 국가재정, 지방 재정이 큰 보탬이 되었다. 특히 소금은 대규모 기아사태를 해결할 때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다. 흔히 기근이 찾아왔을 때 환곡, 즉 곳간을 열어 쌀을 나누어 주는 모습을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경제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던 것은 다름 아닌 소금이었다. 우리 조상은 먹을 것이 없어지면, 들판으로 나가 풀뿌리를 캐어 먹거나 나무껍질이나 연한 풀의 속을 먹었다. 그러나 도저히 그냥 먹을 수 없는 것은 나라로부터 구황염(救荒鹽)을 타 간을 쳐먹었던 것이다. 기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지만, 효과는 대단했다.
조선 시대 널리 쓰이던 소금 생산방식은 자염(煮鹽)이었다. 자염이란 염분이라 불리는 대형 가마에 염도가 높은 정수된 바닷물을 넣고 끓여서 만드는 소금, 혹은 제작공정 자체를 말한다. 자염에 쓰이는 바닷물은 미네랄이 높은 진흙에 정수했기 때문에 천일염보다 품질이 훨씬 우수했다. 20세기 초 조선의 자염은 1831엔(일본 화폐 기준), 일본에서 같은 방식으로 생산한 전오염은 1335엔, 대만과 청의 천일염은 1000엔 수준이었다는 사실로 그 품질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염은 생산단가가 너무 높았다. 이유는 자염을 끓일 때 소모되는 땔감의 비용이 대단히 많이 들었다는 데 있었다. 조선을 일종의 군수공장으로 만들려 했던 일제는 인천을 시작으로 북한 지역에 대대적으로 천일염전을 세웠다. 값싸고 생산성이 좋은 소금을 많이 조달하기 위해서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한때 충청, 전라,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 퍼져 있던 염분은 자연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이는 해방 이후 남한의 소금 공급이 부족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고, 이승만 정부 또한 천일염전을 대대적으로 세우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전통의 자염은 안타깝게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소금과 노초수공업의 발달, 즉 소금 생산과 노초수공의 재료인 갈대가 많이 생산되어 조선의 지역적으로 교류나 생산까지 중요한 지역이 명지(鳴旨)였다. 해방 이후 천일염업의 성행과 플라스틱 제품의 등장에 따라 명지의 자염업과 갈대로 만든 노초수공업 또한 쇠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업들은 몇몇 뜻있는 인사들이 발기하여 중흥을 꾀하였지만 천일염보다 경제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지속성 있는 사업이 되지 못하였다. 아쉬운 점은 산업적, 경제적 실패 때문만은 아니다. 이 지역의 소금과 노초수공업은 영남지방 전체와 낙동강 물줄기를 타고 우리 조상의 노동, 음식, 주거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앞서 살펴보았듯이 기술사적 맥락에서도 그 의미가 남달랐다. 오늘의 우리 모습은 과거의 지층이 쌓이고 쌓인 결과일진데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너무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전남 신안군 증도면에는 유명한 '소금 박물관'과 '태평염전'이 있다. 두 곳은 모두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소금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소금에 대한 인식을 산업 외적으로도 확대하고 있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흔적을 더는 찾기 어려운 지금의 명지도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증도는 천일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우리 전통의 제염방식인 자염의 대표적 생산지였던 명지도 역시 적어도 그만한 가능성을 이상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섬 전체가 온통 갈대밭이어서 갈대를 이용한 '노초수공품'이 특산물이었다고 하는 명지가 좋은 환경과 더불어 주변에서 짚풀을 채취하는 학습의 장이 될 수도 있다. 소금의 문화와 역사, 짚풀의 문화와 역사가 부산의 도시 이미지를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이다.
권민수 한국민속문화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