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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화원이 묘사한 이성린(앞쪽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 '조선통신사행렬도' 부분. 1748년. 대영박물관 소장 |
- 화려한 채색·금칠로 장식한 선박
- 성 안으로 물길 끌어들이는 수차
- 작은 배 수십척 이어서 만든 다리
- 사시사철 눈이 덮여 있는 후지산
- 일본 측에서 베풀어 주는 연회 등
- 주목할 만한 소재 찾아 정밀 묘사
- 화원 이성린이 남긴 '사로승구도'
- 외교·미술사적 가치 높은 기록화
■통신사 화원 이성린과 '사로승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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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린이 그린 요시와라 관소에서 바라본 후지산. '사로승구도' 제작 시기를 제공해 주는 단서가 되는 그림. '사로승구도' 제27폭. 1748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사로승구도'는 1748년(영조 24) 정사 홍계희, 부사 남태기, 종사관 조명채가 이끈 제10차 조선통신사행의 노정 및 주요 행사를 그린 기록화이다. 작품명에서 '사로'는 배를 타고 가는 길, 즉 조선 부산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일본 에도(도쿄)까지 이동하는 경로를, '승구'는 노정 속 명승지를 의미한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사로승구도'는 전체 30폭의 화첩으로 꾸며졌던 것을 후에 15폭씩 두루마리 2권으로 장황하여 '사로승구도권'이라 일컫기도 한다. '사로승구도'의 제작 시기는 화첩 제27폭 우측 상단에 쓰인 "요시와라 관소(吉原館)에서 6월 17일에 눈 덮인 후지산을 바라보았다"는 내용과 조명채가 쓴 '봉사일본시견문록(奉使日本時見聞錄)' 해당 날짜의 장소 및 내용이 일치하여 1748년 통신사행으로 확인되었고, 그린 이는 당시 화원으로 동행한 이성린(李聖麟, 1718~1777)으로 평가되고 있다.
1748년 통신사행의 배경은 1745년 9월 제8대 막부장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1864~1751)가 양위하면서 11월 그의 아들 도쿠가와 이에시게(德川家重·1721~1761)가 제9대 장군에 오른 것을 계기로 조선에서 총 475명 규모의 통신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1748년 통신사행의 일정은 약 10개월이 소요되었다. 1747년 11월 28일 국왕에게 하직하고 1748년 2월 16일 부산에서 출발하여 2월 23일 쓰시마에 도착하였고, 4월 21일 오사카에 배를 정박하고 5월 21일 에도에 입성하여 6월 1일 천황의 섭정인 관백(關白)을 만나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였다. 이후 6월 13일 회정하여 6월 28일 금루선을 타고 오사카에 들어갔고, 7월 7일에 조선의 선박으로 이동하여 7월 18일 쓰시마에 배를 정박하였고, 윤 7월 12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부산에서 윤 7월 14일 출발하여 윤 7월 30일 한양에 들어와 국왕에게 보고를 마쳤다.
■후지산과 수차, 연향 장면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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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린이 일본에서 그린 도석인물화 중 수노인도. 1748년. 나가사키시 소장 |
화원 이성린은 부산에서 에도에 이르기까지 통신사가 묵은 관소, 대표적 명승지, 노정에서 겪은 인상적 장면을 그렸다. 그중 '사로승구도'에서 볼 수 있는 주요 내용을 중심으로 오사카의 금루선(金樓船), 요도우라 성 밖의 수차(水車), 오코시카와의 선교(船橋), 요시와라에서 바라본 후지산, 에도성에서 관백과의 연향 장면 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통신사행이 오사카에 도착하면 요도우라까지 작은 배 수십 척이 깃발을 꽂고 길을 인도하는 가운데 화려한 채색과 금칠로 장식된 누각선인 금루선에 국서를 봉안하여 이동하였는데, 누각선의 제작비용은 은 4000냥 정도로 관백이나 장군이 타는 매우 사치스런 누선을 통신사에 제공하여 극진하게 대접하였다. 사도가와와 오코시카와 선교는 하천을 가로질러 작은 배 수십 척을 연결한 교통수단으로 배 위에 널빤지를 깔아 이어붙이고 배 양쪽을 쇠사슬과 굵은 밧줄로 엮어 양쪽 언덕에 나무기둥을 세워 고정하였다. 특히 '사로승구도' 제22폭은 오코시카와 선교를 묘사한 것으로 사도가와의 3배에 해당하는 길이로 선교에 동원된 배는 280척, 인력이 4400여 명에 이르러 일본 측에 매우 큰 부담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선교의 제작 일정은 약 4개월이 소요되었으며, 통신사행이 왕래한 후에는 다시 해체되었다. 금루선 제공과 선교의 제작은 당시 일본을 왕래했던 조선통신사행의 일본에서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예이다.
통신사행에서 이용후생과 경세치용에 관심이 많던 이들은 지나는 곳의 농작물과 수리시설 등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요도우라의 성 밖에 설치된 수차도 통신사행의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것 중 하나이다. 수차는 성 밖의 호수에 2대를 설치해 물결을 따라 돌면서 성 안에 물을 끌어들이는 기구로, '사로승구도' 제19폭에 자세하게 소개돼 있다. 이처럼 사행에서 화원의 그림은 노정에서 주목할 만한 소재를 찾아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기록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을 더욱 상세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후지산은 일본의 명산으로 요시와라 관소에서 그 전면을 감상할 수 있었으며, 에도에 도착할 때까지 사철 어느 때나 정상에 눈이 쌓여 있어 조선에서는 볼 수 없는 기관(奇觀)이었기에 통신사의 기록뿐만 아니라 '사로승구도' 제27폭과 같이 화원들의 그림 소재로 자주 그려지곤 하였다. 통신사행록에서는 후지산을 일본에서 제일가는 진산으로 간주하여 조선의 금강산에 자주 비유하기도 하였다.
'사로승구도' 제30폭은 6월 1일 일본 국왕를 보좌하는 최고 중직인 관백이 삼사에게 조선국왕의 국서를 전달받은 후 연향을 베푸는 장면이다. 관백 저택의 정당(正堂) 대청에 금관조복을 입은 삼사신이 일본 황가를 섬기는 세습관료인 세신(世臣), 수석 집정(執政)과 마주 앉았고, 안쪽 중앙에 관백이 앉았다. 쓰시마 번주는 대청 밖에 나와 자세를 낮추고 있으며, 대청 뒤쪽으로 조선통신사 일행과 일본 각주에서 온 태수들이 열을 맞춰 대기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로승구도'는 조선화원이 통신사행의 노정을 그린 작품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매우 희귀한 작품일 뿐만 아니라, 화원 이성린이 1748년 조선통신사의 노정과 에도에서 공식적 외교활동을 자세히 그림으로써 외교사적·미술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는 기록화이다.
# 일본 대표 고령의 화가에게 신의 경지 달했다 평가받던 31세 이성린이 그려준 그림
- 근세 日 미술계에 큰 영향
이성린은 집안 대대로 역관을 배출한 전주 이씨 가문 출신으로, 영조 연간(1725~1776) 후반에 도화서에서 활동한 화원이다. 그가 1748년 통신사행에 뽑힌 것도 당시 일본에서 그림을 잘 그리는 조선 화원의 그림에 대한 수요가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이성린이 방일 중 그린 그림의 소재는 산수화, 화조도 등 매우 다양하였다. 통신사행을 마치고 영조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영조가 화원의 활동에 대해 묻자 정사 홍계희를 포함한 삼사가 답한 바에 의하면, 이성린은 관백을 비롯한 태수, 봉행에 이르기까지 그림 요구에 응수하여 기존 통신사행의 화원들보다 뛰어나다는 인정을 받았던 듯하다. 특히 그들은 이성린이 그린 산수 및 도석인물화에 대해 매우 탄복하여 신의 경지라고 평하였다.
이성린은 방일 당시 31세로, 1748년 6월 28일 오사카의 가노파(狩野派·에도시대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파)를 대표하는 68세 고령의 화가 오오카 슌보쿠(大岡春卜·1680~1763)의 요청으로 화회(畵會)를 가졌다. 이때 이성린은 '매월도', '묵매도', '묵죽도', '복록수도' 등 4장을 그렸고, 슌보쿠는 '야마도(野馬圖)', '산수도', '매화도', '장과절지도' 등을 그려 서로 교환하였다.
슌보쿠가 당시 화회를 기념하여 1749년 간행한 '상한화회가표집(桑韓畵會家彪集)'에 이성린의 '묵매도'와 '묵죽도'가, 1751년 명나라 및 조선 화가들의 그림을 모아 간행한 '화사회요(畵史會要)'에 '매월도'와 '수성도'가 포함되어 오사카의 가노파 화가들을 비롯한 근세 일본화단에 이성린의 회화를 전수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850년 간행되어 일본회화사의 기초 자료가 되었던 '고화비고(古畵備考)' '조선서화전'에 포함된 역대 통신사 화원 정보에도 이성린의 '송죽도'와 '묵매도' 낙관이 수록되어 슌보쿠가 간행한 '화사회요(畵史會要)'가 기준 자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은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
※공동기획: 부산문화재단, 조선통신사학회,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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