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글래스고대학에 있는 애덤 스미스 비즈니스 스쿨. 스미스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건물이다. 글래스고 대학은 애덤 스미스가 수학하고 재직하였던 곳이다. 스미스는 여기서 자신의 인생과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 즉 스승이자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운동의 아버지인 프랜시스 허치슨 교수와 선배이자 친구였던 경험론 철학자 데이빗 흄을 만난다. 허치슨 교수가 은퇴하자 스미스는 그 자리를 물려받아 모교의 도덕철학 교수가 된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는 너무도 유명한, 그의 사상과 학문의 핵심을 한 마디로 요약해 주는 말이 나온다. 바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다. 그런데 이 말처럼 스미스를 유명하게 만든 것도 없지만, 이 말처럼 스미스를 오해받게 한 것도 없다. 왜냐 하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이란 사람들이 흔히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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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덤 스미스의 동상. |
사람들은 스미스가 말하고자 한 바가 시장에는 보이지 않는 손―대개는 가격을 가리킬 때가 많다―이 있어서 저절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뜻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 시장에 맡겨 놓으면 최상의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부론'에는 과연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이 몇 번이나 나올까? 정확히는 몰라도 '국부론'이라는 책은 온통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로 뒤덮여 있을 듯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국부론'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이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의미도 사람들이 흔히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애덤 스미스는 모든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면 전혀 의도하지 않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사회의 이익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손이 하는 일은 개인의 이익 추구가 사회 전체의 이익에 기여하도록 해 준다는 것이다. 시장에 맡기면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된다는 등의 이야기는 '국부론'의 어느 곳에도 없다. 반대로 스미스는 상인과 자본가들의 탐욕은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사려 깊게 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이지 않는 손 못지 않게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잘 설명해 주는 말이 이기심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스미스를 읽지 않고 자기 입맛대로 스미스를 해석하려는 사람들의 오해가 나타난다. 스미스가 인간의 이기심을 옹호했다는 것은 꼭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옳은 말이라고 할 수도 없다. 스미스는 여러 가지 문맥 속에서 때로는 이기심을 옹호하고 때로는 이기심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기심이라고 하면 흔히 자기 이익을 위해서 타인의 이익을 침해하고 타인의 재산이나 신체를 훼손하는 탐욕과 약탈의 마음을 연상한다. 기업이 비용을 아끼기 위해 공해물질을 하천에 방류하는 것도 이기심 때문이며, 건강에 유해한 물질을 식품에 섞어 판매하는 것도 이기심 때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를 분노케 한 대기업의 밀어내기, 일감 몰아주기, 을에 대한 갑의 횡포 등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래서 스미스가 개인의 이기심을 옹호했다는 말은 마치 시장에서는 이윤을 위해 이런 행위들이 모두 용납되는 것처럼 주장했다는 의미로 오해된다. 그러나 스미스는 이러한 불건전한 이기심에 대해서는 당연히 부정하였다. 그가 긍정한 것은 타인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고 반대로 타인의 이익에 기여하는 건전한 이기심만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스미스가 개인과 사회의 이익에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실은 '이기심(selfish)'이라기보다 '자애심(self-loving)'이었다. 실제로 '국부론'에는 이기심이라는 말보다 자애심이라는 말이 더 자주 나온다. 지난번에 언급한 장 자크 루소도 '인간불평등기원론(1754)'이라는 다른 저작에서 이기심과 자애심은 전혀 다른 감정이라고 구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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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덤 스미스의 묘. 그의 묘비에는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저자 여기에 묻히다."라고 쓰여 있다. |
세상에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스미스의 의도는 사람은 누구나 지금보다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하고 자기향상을 위하여 더 많이 노력한다는 것이다. 또한 나아가서 이렇게 모든 개인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노력하면 그 결과로 사회도 발전하고 국부도 증진된다는 것이 '국부론'의 핵심적인 사상이다.
스미스는 그가 살던 당시에 낡은 사회체제를 뒤엎으며 막 나타난 새로운 경제질서에서 그러한 건전한 이기심을 발견하였다. 낡은 사회에서는 성실한 노동과 노력이 반드시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였다. 부는 거의 예외 없이 탐욕과 약탈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는 누구든 성실하기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의 사회였다. 요컨대 스미스는 그 시대의 다른 누구보다 더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는 본성을 인식하였고, 새로운 사회가 그러한 인간성을 배양하고 만개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누구보다 잘 통찰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스미스가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이다. 스미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스스로 더 행복해지기를 두려워 말라. 네가 더 행복해지면 타인도 더 행복해질 것이고, 사회도 더 행복해질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 모두를 더 행복해지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 공정한 관찰자 '도덕감정론'
- 마음 속의 선한 관찰자가 공공의 선을 추구하도록 이끌어준다는 생각
- 계몽주의의 공통 사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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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의 속표지. |
'국부론'이 스미스에게 큰 명성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스미스는 학자로서 대단한 명성과 존경을 누리고 있었다. '국부론'보다 먼저 그를 유명하게 만든, 그리고 스미스 자신도 '국부론'보다 더 중요한 저작으로 생각한 책이 바로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1759)'이다.
오해받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아무튼 스미스가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너무도 유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스미스가 인간은 공감(sympathy)의 존재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람은 누구든 타인의 불행을 보면 슬퍼하고 타인의 행복을 보면 기뻐한다. 자신에게 아무런 이익도 생기지 않더라도 그러하다. 공감은 이익의 판단에 선행하는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관찰자가 자신의 행동을 관찰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개인만의 이익보다 공평함과 공공의 선을 추구하여 행동한다는 이런 생각은 그 시대의 계몽주의자들에게 공통된 사상이었다. 가령 독일의 철학자 임마뉴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내 머리 위에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 있고 내 마음 속에는 도덕률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 도덕률이 바로 스미스가 말한 공정한 관찰자인 셈이다. 더 멀리 거슬러 가 보면 토머스 모어도 '유토피아'에서 "이 섬의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고 이야기하였다. 여기서 마음대로라는 뜻은 무뢰하거나 방탕하다는 뜻이 아니라, 누구든 자기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는데도 전혀 공공의 이익에 어긋나지 않을 만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뜻이다. 르네상스 시대 사상가들의 인간관을 잘 보여 주는 말이다. 과연 지금 우리들 마음 속에서는 무엇이 빛나고 있을까?
조준현 부산대 경제학부 교수·참사회경제교육연구소장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