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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일 광복로에서 열린 2013 조선통신사 축제에서 평화의 행렬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한일 양국 민간단체들은 조선통신사를 유네스코 유산으로 공동 등재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곽재훈기자 |
14일부터 '조선통신사를 유네스코 유산으로-부활! 한일 新실크로드' 시리즈를 연재한다. 앞서 지난 1월 22일부터 5월 7일까지 게재한 15회의 1차 시리즈가 조선통신사를 개괄적으로 소개했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룬다. 최근 한일 민간단체의 주도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점점 현실화하는 분위기에서 어떤 기록 유산들이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지 소개하고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다양한 사건과 그 이면에 숨은 배경, 조선통신사가 거쳐 간 국내 지역들을 살펴본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학자도 집필에 참여해 조선통신사를 폭넓은 시각으로 조망한다.
- 조선통신사가 임란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었듯
- 지금의 통신사도 식민의 상처를 씻어내기 힘들다
- 마음 깊숙이 칼을 품고 믿음이나 우정만을 강조하는
- '선'의 외교에서 벗어나
- 공존을 위한 현실적인 노력, '면'의 교류를 해야 한다
임진왜란 이후 국교가 재개되면서, 조선 후기 한일 교류사는 왜관과 통신사의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통신사가 한시적, 제한적, 명분적인 교류였다면, 왜관은 지속적, 구체적, 실리적인 교류였다. 왜관은 일본과 조선, 대마도와 동래 사이에서, 국가와 지역, 그리고 개인 간 이해관계가 타협하고, 수용하고, 충돌하는 치열한 접경지대였다.
통신사는 조선 후기에만 간 것은 아니다. 최초의 통신사는 고려 때 갔고, 조선 전기에도 회례사, 보빙사, 통신사, 통신관 등의 이름으로 일본에 갔다. 그러다가 점차 통신사로 이름이 통일되었다. 1876년 개항 이후에 네 차례 일본에 간 사절의 이름은 통신사가 아니라 수신사였다. 네 차례의 수신사 외에도 1881년 조사(朝士)시찰단 이름으로 한 차례 갔다. 이처럼 일본에 간 조선 국왕의 사절 이름은 다양하였다. 사절의 이름만큼이나 파견 목적이나 성격도 그만큼 다양하였다. 통신사를 보내는 나라와 맞이하는 나라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였다. 조선에서는 일본국통신사, 일본통신사, 일본신사, 통신사, 일본에서는 조선통신사, 조선신사, 통신사 등으로 불렀다. 그러나 조선에서도 조선통신사라 쓴 사례가 있다.
■자만과 편견-'선(線)의 통신사'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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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마역사민속자료관에 전시된 '성신의 교린' 기념비. 아메노모리 호슈를 현창하는 비석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
흔히 언급되는 조선 후기 열두 차례의 통신사 가운데 처음 세 차례는 회답겸쇄환사였다. 1636년부터 통신사란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이웃 나라와 신의, 예의, 의리, 도리라는 유교적 가치를 전제로 한 외교관계를 맺었다. 통신사는 이런 이념과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 파견한 외교사절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기억으로 일본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절 이름에 '신(믿음)'을 쓰지 못했다. 그래서 회답겸쇄환사로 이름을 정한 것이다. 조선 후기 일본과의 교류, 그 최전방에 있는 동래부 동헌 앞에 서 있는 대문의 양쪽 기둥에, 이웃과 사귄다는 '교린'과, 변방을 지킨다는 '진변'이 나란히 걸려있는 것은 이를 바로 말해준다.
1763·4년 통신사의 정사 조엄은 '강호에서 어명을 전달하면서'란 시에서 "임진년을 추억하니 눈물이 쏟아지네"라고 읊었다. 함께 간 남옥은 출발하기 전 동래 충렬사를 참배하면서 임진왜란의 기억을 회상하였다. 1748년 통신사가 갈 때, 화가 최북에게 친구 이현환은 일본 구경만 하지 말고 나라가 보낸 깊은 뜻을 생각하면서, 여가가 나면 몰래 산천, 인물, 성곽, 기계 등을 그려 와서 뒷날의 전쟁에 대비하면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통신하는' 친구를 만나러 가면서 속으로는 적으로 간주하는 양면성을 보였다.
통신사와 인연이 많은 일본의 아메노모리 호슈는 '교린제성'이란 책에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진실한 마음으로 사귀는 '성신교린'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성신교린보다 더 우선하는 것은 일본의 국익이나 대마도의 이익이었다. 실리를 담보하지 않는 통신은 공허한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 1719년 통신사 때 신유한은 호슈와 자주 만나고 교류를 하였지만, 호슈를 '겉으로는 학문을 논하지만, 마음속에는 창과 칼을 품었으니, 높은 지위에서 권력을 잡았으면, 이웃 나라에 일을 내었을 것'이라고 평하였다.
이처럼 '신'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보이고 있었다. 전쟁의 상처가 쉽게 치유되지 않아서, 믿음의 이면에는 불신이 감춰져 있었다. '통신'사란 이름으로 갔지만, 일본에 대한 불신과 섬나라 오랑캐라는 멸시관이 마음속에 깔렸었다.
통신사가 오고 갔지만, 그 밑바탕에 조선은 소중화주의나 조선중화주의, 일본은 일본형 화이질서라는 '자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sm)'가 깔려 있었다. 통신사는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하는 외교사절이지만, 점차 문화사절로서 비중이 높아지면서 일본열도를 열광시킨 한류의 원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열광의 이면에는 냉담함도 존재하였다. 조선멸시관에 서서 통신사를 조공사절로 보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었다. 조선 시대 통신사는 조선/일본으로 병존하는 점을 연결하는 '선(線)의 통신사'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인식 전환과 공존-'면의 통신사' 지향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한계는 극복되고 있었다. 북학파 실학자 박제가는 통신사가 여러 차례 일본에 갔지만, 일본의 훌륭한 법을 한 가지도 배워오는 자가 없으면서, 왜놈(倭奴)이라고 비웃는 것을 비판하였다. 1763·4년 통신사 때 서기 원중거는 일본을 '바닷속에 있는 문명의 땅'으로 인식하였다. 일본을 섬오랑캐, 왜놈의 나라가 아니라 문명의 나라로 인식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자만을 넘어서 타자를 인정하는 인식의 전환이었다. 최근 일본인 학자 다카하시 히로미는 통신사-기무라 겐카도-북학파로 연결되는 교류의 네트워크를 '동아시아 문예공화국'이라고 표현하면서, 통신사가 왕래하던 때에 국경을 넘어서는 마음의 교류가 있었음을 강조하였다. 겐카도 등 오사카 문인들과 성대중 등 통신사의 교류와 그것이 북학파에 끼친 영향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두 나라의 자만과 편견에도 통신사의 시대는 불안정하지만, 평화의 시대가 지속하였다. 그것은 '믿음'의 교류라는 이상 때문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이상을 유지하려고 한 노력의 결과였다. 그 중세적인 이상은 근대에 들어와서 곧 균열이 일어났다. 균열은 35·6년 간의 제국과 식민이란 역사적 유산을 남겼다. 이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한일 두 나라의 국민에게 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 부산에서 발신하는 통신사는 한일 문화교류, 친선교류에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독도나 대마도 등 영토 문제, 식민지 지배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과거사 문제가 나오면 양 국민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일본에서 부는 '한류'의 열풍 이면에 '혐한류'의 바람 또한 만만하지 않다. 조선 시대 통신사가 임진왜란의 유산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처럼, 21세기 통신사는 식민지의 유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양국의 역사가 남긴 이 유산은 계승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극복해야 될 과제다. 이 난제는 믿음이나 우정만 강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을 하는 데는 조선 시대 통신사의 장점을 계승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점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것도 중요하다. 21세기 통신사는 국가사, 민족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 속에 자리 잡은 제국주의적, 문중주의(門中主義)적 인식 또한 극복해야 한다.
최근 통신사를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한일 양국 민간단체가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통신사를 보는 지금 우리는 선린 우호의 상징인 이상론 못지않게, 이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한 현실론을 인식해야 한다. 2002년에 월드컵을 공동으로 개최한 것은 두 나라의 노력이 낳은 좋은 선례다. 두 나라의 만남 역사는 점으로 병존하는 관계사가 아니라 면으로 공존하는 교류사가 돼야 한다. 이 또한 이상론일 수 있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21세기 통신사는 상생의 논리로서의 공존과 면의 통신사가 되어야 한다. 21세기 통신사가 가는 멀고 힘든 길에 조선 시대 통신사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김동철 부산대 사학과 교수·한국민족문화연구소장
※공동기획: 부산문화재단, 조선통신사학회, 국제신문
※협찬: 한국수력원자력(주)고리원자력본부, YK Steel(주)
※후원: 누네빛안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