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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는 문학기행 <27> 정진규 시인과 함께하는 안성 기행

낙향한 老시인의 집마당에는 조강지처 나무가 노랗게 웃고있다

  • 이승렬 기자 bungse@kookje.co.kr
  •  |   입력 : 2013-04-23 19:55:04
  •  |   본지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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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규 시인(두 번째 줄 오른쪽 다섯 번째)과 문학기행 참가자들이 지난 21일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정 시인의 생가이자 집필실인 '석가헌' 별채 토우방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60년대는 한국 시단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던 시기. 수많은 시인이 명시를 토해내고, 평가하고, 논쟁하고, 고뇌했던 시절이다. 특별히 시의 순수성과 참여성에 관한 논쟁이 심했다. 이는 어두운 시대 현실 속에서 빚어질 수밖에 없었던 현상이다. 일면 '개인이 먼저냐', '집단이 우선이냐'의 논쟁이기도 했다. 고려대 국문학과 재학 시절인 1960년 시 '나팔 서정'을 통해 등단한 정진규 시인 역시 당시 쟁쟁한 선배 시인과 동년배들 사이에 빚어진 논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화려하고 섬세한 언어적 수사와 자아의식의 심층에 관한 탐닉이라고 평가받는 시를 써내던 20대 청년 시인은 괴로웠다. 시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의 괴리를 경험하면서 심각한 내적 갈등을 겪게 된 그는 시론 '시의 애매함과 정직함에 대하여' 등을 통해 스스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시적 탐닉과 일상적인 삶의 건강성 사이의 평형을 쉽게 회복할 수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청년에서 장년으로 흐른 정진규는 시에 산문의 리듬을 도입했다. 그는 개인의식에서 집단의식으로 이행하는 계기를 얻게 되고, 자기확인의 과정을 통해 그 견실성을 확보한다. 안과 밖이 다르지 않으며, 개인과 집단이 단절돼 있지 않으며, 정신과 육체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몸의 본질에서 찾았다. 그리고 몸의 본체는 생명의 근원인 알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와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라는 점을 시적 승화로 구현해냈다. '껍질을 깨고 나온 율려(律呂)의 시인'이라고 불렸다. 율려는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우주의 흐름과 리듬이다.

시단에서 유려한 산문시를 창조한 시인. 다소 철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몸詩' '알詩'를 잇달아 세상에 내놓으면서, 자신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시단의 논쟁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던 인물. 정진규 시인. 이제는 고향 생가터에 작은 집필실을짓고, '영혼의 촉매'인 부인 변영림 여사와 함께 만년을 보내고 있지만 왕성한 시작 활동만은 여전하다. 26년째 시 전문지 '현대시학' 주간의 임무도 맡고 있는 그를 지난 21일 30여 명의 문학기행 참가자들이 찾아갔다.

■저녁이 아름다운 삶

   
참가자들이 조병화 시인의 고향인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에 있는 '조병화문학관'을 둘러보는 모습.
석가헌(夕佳軒). 저녁이 아름다운 집이라는 뜻이다. 서예가로서 그의 호 경산(絅山)을 따 '경산체'로 불리는 서체의 창시자로도 유명한 집주인이 직접 쓴 현판이 대문에 걸려 있다.

정 시인은 부산에서 안성까지 달려온 여행자들을 향해 인자하고 환한 미소를 베풀며 기꺼이 맞아들였다. "30년 동안 살던 서울 수유리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벌써 6년이 됐네. 50년 만의 귀향이었던 셈이지. 이곳은 나의 생가터예요. 조상 대대로 살던 집터인데, 사실은 여기가 원래는 묘막이었어. 내가 내려오게 된 것도 기실은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니 조상님들 묘를 지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나는 묘지기예요. 하하하."

자신을 '묘지기'라고 표현하는 시인의 표정에 은근한 자부심과 평화가 묻어난다. 집터가 꽤 넓어 보였지만, 사실은 조선 정조 때 우의정까지 지낸 그의 18대 할아버지가 부모님을 여의자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시묘살이를 한 것에 감복한 정조 대왕이 하사한 땅이다. 당시 정조 대왕은 유독 아끼던 신하였던 그의 할아버지 효심에 감복해 이 땅과 함께 '모년봉춘 심축유년(暮年逢春 深祝有年)'이라는 글을 써서 내렸다고 한다. 풀이하자면, '늙은 나이에 봄을 맞이했네 나머지 해를 잘 살기를 진심으로 축하한다'가 된다. 늙은 나이에 부모님 곁에 들어가서 시묘살이하는 것은 봄을 맞이하는 것이고, 효가 근본이었으니 가장 행복한 것이므로 정말로 축하한다는 의미다.

그 터에 새로 집을 짓고 너른 앞마당에 수유리에서 옮겨 온 산수유나무를 심었다. 마침 문학기행단이 방문한 날 산수유나무가 샛노란 꽃을 피웠고, 텃밭에는 푸릇한 새싹들이 움을 틔우고 있었다. 정 시인은 한동안 살았던 서울 수유리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던 심경을 2009년 고희를 맞아 펴낸 시집 '공기는 내 사랑'에 담긴 시 '수유리를 떠나며'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수유리 30년을 데리고 나 떠난다 얼컥 이는 호끈한 내음 가슴 안고 나 떠난다 두고 갈 수 없었다 산수유 한 그루, 꽃 피면 떼로 날아들던 꿀벌들의 몸즙 향기, 얼컥 이는 호끈한 내음, 순전히 그걸로 길 찾아들었다 예까지 왔다 산수유 30년을 데리고 나 떠난다 산수유별사를 따로 쓰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산수유 꽃 피는 올봄에도 꿀벌들 새집 찾아들게 되었다 나도 새집 찾아들게 되었다 산수유 30년, 새집 마당에 얼컥 이는 호끈한 내음! 순전히 옮겨 심게 되었다'('수유리를 떠나며' 전문)

현재의 집필실이자 초년의 집이며 만년의 집이기도 한 이 집의 현판을 '석가헌'이라고 한 것은 '저녁이 아름다운 집'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저녁이 아름다운 삶'을 바라는 시인의 희망이 담겨 있다. 인생의 저녁이라고 할 수 있는 만년에, 스스로 자제하고 삼가면서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사랑하며, 글쓰는 즐거움

석가헌 본체 옆 자그마한 별채로 따로 지어놓은 토우방(土偶房) 앞. 지팡이를 짚고 선 채 조용한 목소리로 뜨락에 모여 앉은 여행자들에게 내뱉는 노(老)시인의 음성에는 시인으로서뿐 아니라 시대의 격동 속에 몸 던지며 살아낸 한 어른의 삶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知), 화(和), 락(樂). 이 말을 요즘 참 많이 생각해요. 일종의 깨달음인 셈인데…. 뭔가를 하려면 먼저 알아야 해요. 그리고 서로 조화를 이루며 친해져야죠. 그걸로도 충분하지 않아요. 함께 즐겁게 놀아야 돼요. 그래서 결국 지 화 락인데, 사람이 살아가면서 평화를 이루려면 이 세 가지를 명심하고 살아야죠. 그런 마음으로 시를 써야 완성도 높은 시가 나오고, 사랑도 그렇게 해야 진짜 사랑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러면서 시인은 텃밭을 손으로 가리켰다. "요즘은 저기 텃밭에 채소 키우는 재미가 쏠쏠해요. 저들도 생명이고, 감정이 있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요. 자주 손길을 주면 웃으며 화답하고, 내가 게을러 소홀히 하면 저들도 심통을 부리는 것인지 좀처럼 자라기를 거부하죠. '곡식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는 말이 있듯이 내가 저들을 알고, 친해지고, 함께 즐긴다는 심경으로 부지런을 떨면 저들도 화답하니까. 결국 실천하면서 자연에서 배운 거죠."

시인의 목소리는 울림이 크다. 큰 어른이 던지는 지혜의 소리다. 시인이 사는 마을에 저녁이 오고 있었다. 뒷산 끝자락으로 노을이 피어난다. 손님을 대접하겠다며 시인이 내놓은 막걸리 통에서 '술 익는 내음이 솟는다'. 노을빛 마시는 아름다운 시인의 마을에 술이 익고, 시인의 음성은 젖고, 여행자들의 볼은 불그레하다.


   
이날 정 시인을 찾아가는 길에는 부산에서 김예강(시와 사상 편집장), 김종미 손순미 정안나 신윤숙 등 많은 시인이 동행했다. 정 시인을 따르는 서울 경기 지역의 현대시학회 동인인 우대식 김왕노 고영 한용국 김광기 이현우 김기주 정민나 이해존 김원돌 시인 등이 함께 여행객들을 맞았다. 또 이기호 안성문인협회장과 김정조 시인이 조병화 문학관과 박두진 기념관, 궁예와 인목대비 임꺽정 박문수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천년고찰 칠장사 등을 안내하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경기도 안성은 많은 큰 시인을 배출해낸, '시의 고향'같은 땅이다.


▶시인 정진규(鄭鎭圭)는

-1939년 10월 19일 경기 안성 출생

-1958년 안성농고 졸업

-1964년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1960년 시 '나팔 서정(抒情)'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등단. '현대시' 동인(~현재)

-1988년~현재 시 전문지 '현대시학' 주간

-1998년 제31대 한국시인협회 회장 추대(~1999)

-고려대 순천향대 강사,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역임

-현재 고려대 대학원에서 강의 중

-시집 '마른 수수깡의 평화(1965)' '유한의 빗장(1971)'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1977)' '매달려 있음의 세상(1979)' '비어 있음의 충만을 위하여(1983)' '연필로 쓰기(1984)' '뼈에 대하여(1986)'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1990)' '몸詩(1994)' '알詩(1997)' '도둑이 다녀가셨다(2001)' '본색(2004)' '껍질(2007)' '공기는 내 사랑(2009)' '율려집(律呂集)·사물들의 큰언니(2011)', 시론집 '한국현대시산고(1983)' '질문과 과녁(2003)' 등

-한국시인협회상(1980), 월탄문학상(1985), 공초문학상(2001), 대한민국문화훈장 보관(2006), 현대불교문학상(2008), 이상시문학상(2009), 만해대상 문학부문(2010), 김삿갓문학상(2011) 수상


▶주최=롯데백화점·부산문화연구회

▶특별후원=국제신문

▶참가문의=http://문학기행.kr (051)441-0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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