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최초의 인쇄업자 캑스턴이 출판한 '이솝우화'(1484년)에 실린 '여우와 신포도'의 삽화

- 오랫동안 '어른의 축소판' 여겨

- 우화나 공상이야기 금기시 해

- 계획적으로 내용 빼거나 첨삭

- 어린이 특성 이해한 최초 책은

- 유럽 민화 모아 낸 '페로의 동화'

어른들은 오랫동안 어린이는 단지 어른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역사 드라마에서 어린이들은 어른의 옷을 줄여서 입은 것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다. 목소리만 다를 뿐 거드름 피우는 말투도 어른과 똑같다. 이런 현상은 유럽이라고 다른 것은 아니다. 서양의 미술관에 걸린 소년 소녀의 초상화들은 한결같이 어깨에 견장을 달고 홀쭉한 바지차림이며, 레이스가 달린 벨벳 치마, 허리를 졸라맨 리본, 깃털 달린 모자 등 당시 어른들의 복식 그대로를 축소한 것이다.

아동문학은 어린이는 어른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이며, 그들의 세계는 매우 독특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리스 시대에는 어린이란 성인이 되기 위해 끝없이 훈련을 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더구나 로마 후기 그리스도교와 함께 원죄사상이 공인되면서, 인간은 탄생과 함께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가 지은 원죄를 짊어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은 채 죽은 어린이는 당연히 지옥의 불길에 떨어질 가련한 어린 영혼이다. 16세기 중엽 청교도가 전 유럽에서 크게 세력을 떨치던 무렵에는 옛이야기마저 어린이들을 타락시키는 것으로 금기시했으며, 꾸며낸 우화나 허무맹랑한 공상이야기, 음란한 이야기, 사랑의 노래 따위는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인쇄술이 도입되기 전 15세기 유럽에서는 필사본으로 운문 형식의 딱딱한 교훈을 담은 어린이를 위한 '예절 책'들이 유행했다. 운문을 사용한 것은 어린이들이 쉽게 외우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이야, 너의 책이나 모자나 장갑/그리고 네게 필요한 모든 물건을 챙기렴.

안 그러면 혼이 나고 알몸으로/흠뻑 얻어맞을 테니. -파니발의 '어린이책'에서-

얼마나 가련한 일인가. 이렇게 아름다운 소녀인/ 내가 지옥으로 가야 하다니.

-에이브러햄 치어의 '어린이를 위한 거울'에서-

(타운젠트 저, 강무홍 옮김, '어린이 책의 역사'에서 재인용)

	우리나라 최초의 완역본 '이솝우화 전집'(1998년) 표지

지식인들의 무시에도 이런 시기에 여전히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민화가 있었다. 영국 최초의 인쇄업자였던 윌리엄 캑스턴은 1484년 삽화를 곁들인 '이솝우화'와 '여우 레이나드'를 출판했다. 예절 책을 주로 인쇄한 캑스턴이 '이솝우화'를 인쇄한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솝은 기원전 6세기의 인물로 그리스의 메셈브리아라는 마을 출신이며, 로마의 전쟁포로가 끌려가 노예로 전락한 인물로 추정된다. 이솝은 집사나 비서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주인을 위한 재치있는 우화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기원전 300년경에 디미트리우스가 '이솝우화집'을 만들었다. 100여 편의 우화가 담긴 것으로 당시에는 이솝이 우화의 대명사였던 시대였다. 빅토리아조의 영국에서는 이솝우화를 영역하면서 기독교적인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내용을 빠뜨리거나 첨삭하기도 했는데, 캑스턴이 인쇄한 '이솝우화'도 어린이들을 위한 교훈이나 훈계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이솝우화'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1895년 국내 최초의 신식 교과서인 '신정심상소학'인데, 여기에는 '새로운 이야기'라는 표제로 7편이 소개되었다. 그 후 어린이를 위한 번역판들이 나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교훈을 줄 목적으로 일부를 발췌해 내용을 의역한 것들이다. 1998년 문학평론가 신현철이 '이솝우화 전집'을 출판했다. 에밀 샹브리의 '이솝우화 전집'을 바탕으로 358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이 책은 '어른을 위한'이라는 단서를 붙였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완역본이다.

17세기에 이르면 어린이들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어린이들이 교훈 이야기나 교리 문답에 얼마나 지쳐있는지를 깨닫기 시작했지만, 정작 행동으로 옮긴 작가는 프랑스 학술원 회원인 샤를 페로가 처음이다. 유럽에서 구전되던 민화들을 모아 1679년 '교훈을 동반한 옛이야기, 또는 짧은 이야기'를 펴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페로의 동화'다. 평론가를 비롯한 당시 지식인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페로는 원고를 직접 출판사에 가져가는 열정을 보였다. 이것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페로의 이러한 용단이 있었기에 세계의 어린이들은 '빨간 모자'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신데렐라' '푸른 수염' '엄지 동자'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주옥같은 동화의 세계 속을 마음껏 활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샤를 페로는 동화라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사람으로 아동문학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되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생트뵈브는 페로의 동화를 가리켜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라는 인간의 미덕 가운데 하나인 만인의 영혼을 거세게 뒤흔드는 소박함'이라고 칭찬했다. 이것은 호기심으로 가득한 어린이들의 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한 위대한 작가에게 보내는 인류의 찬사이기도 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