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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 여사가 지난 23일 경기도 용인시 자택에서 문학기행 참가자들에게 김수영의 문학 정신과 삶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
1968년 6월 15일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 서울 마포구 구수동에서 귀가 중이던 시인 김수영에게 버스 한 대가 덮쳤다. 온몸에 중상을 입고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다음 날 새벽 5시께 아내 김현경과 가족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했다. 그해 5월 29일에 써놓고 미처 발표도 하지 못했지만, 사후 최고의 절창으로 평가받는 '풀'처럼 시인은 스스로 풀이 되어 누웠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의 죽음은 '한국 현대문학 100년사에서 가장 슬픈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45년. 남편의 시와 유품을 끌어안고 사는 김현경(86) 여사는 이달 초 펴낸 에세이집 '김수영의 연인'에서 그날 시인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형형하던 동공은 빛을 잃었고, 귀에는 피가 흘러나왔으며, 손과 팔꿈치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나는 흐느끼면서 말없이 그의 두 눈을 감겨주었다. 김 시인은 조각처럼 희고 단정한 얼굴로 무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었다."
지난 23일 30여 명의 문학기행 참가자들은 '아직도 마흔여덟 시인 김수영과 동거 중'이라는 시인의 아내를 찾아 경기도 용인시 마북동의 한 아파트를 찾았다. 김 여사는 팔순의 노인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정정했다. 화사하게 화장을 한 채 밝게 웃으며 반겨준 김 여사는 남편의 시 제목처럼 '풀'빛 가득한 초록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탁자에 내놓은 청포도마저 풀빛이다.
■"책을 사랑한 그는 지금도 나를 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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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여사가 시인의 유품들을 방 한칸에 정성스레 꾸며놓은 '김수영의 서재' 모습. 이승렬 기자 |
김 여사는 거실에 가득한 여행자들에게 벽에 걸린 그림을 가리킨다. 풀빛 바탕에 나무를 심는 남자와 그 앞에 기도하는 소녀가 그려진 김은숙 화가의 작품이다. 그는 "남자는 수영이고 그 앞 기도하는 소녀는 나야. 그림을 처음 봤을 때 그와 나를 그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바로 샀지"라며 "저 뒤쪽에 호기심 많아 보이는 소녀와 그 옆의 머리를 갸우뚱하고 있는 소년의 조각상이 보이지? 저것 역시 나와 시인을 빚은 것 같아서 가져왔지"라고 말했다. 거실에 놓인 미술품들은 모두 시인과 자신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김 여사는 해방 이전 여섯 살 연상인 김수영을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나는 문학소녀였고 그는 아저씨였지. 진짜야. 이화여대 스승인 정지용 시인이 나더러 '건방진 애'라고 놀리면서도 늘 대학 문회지에는 내 작품을 실어주셨을 정도야"라며 밝게 웃는다. 그는 김수영 시인을 처음 만났을 때나 그가 떠난 후 지금이나 항상 문학소녀였다고 한다. "내가 예나 지금이나 문학소녀이기에 그 정열로 김수영이라는 시인을 이제껏 끌어안고 지켜온 것이지."
화제는 자연스럽게 최근 펴낸 책 '김수영의 연인'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녀는 "사실은 제목 정할 때 내가 실천문학사 사장하고 다퉜어. 나는 '김수영의 여편네'가 최고라고 생각했거든. 우리는 '연인'이라는 달콤한 말이 어울리는 부부가 아니었어. 시와 수필에서도 온통 내 흉을 보면서 여편네라고 하지 않았어"라며 후일담을 들려준다. 그러나 김 여사가 졌단다. 이유는 책을 안 읽는 세태 속에서 조금이라도 책이 많이 나가려면 '연인'이라고 해야 한다는 출판사 측 말에 동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수영을 생각했어. 그는 술에 취하면 때때로 발길질할 정도로 내게 수난도 안겼지만, 그래도 나는 그를 최고의 인간으로 생각했어. 그의 유별난 책 사랑 때문이지. 그래서 나는 책벌레 김수영의 여편네로 산 것이 행복해. 젊은 사람들도 제발 책 좀 읽어야 할 텐데"라고 웃는다.
■아무도 뽑지 못한 가슴에 꽂은 화살
생전의 시인 김수영은 원고지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포장지의 뒷면을 주로 사용했고, 원고지가 있어도 뒤집어서 백지에 초고를 썼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고지에 정서하는 것은 늘 김 여사의 몫이었다. 그는 "나를 불러서 2부를 쓰게 했는데, 그러다 보니 나는 수영의 시를 가장 먼저 읽은 첫 번째 독자였어. 자연스럽게 거의 모든 시의 배경과 의미를 알게 됐지"라고 말했다. 이번에 책을 낸 가장 큰 이유도 난해한 남편의 시를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쉽게 읽을 수 있게 해주려는 의도라고 한다. 김수영 시에 대한 해설을 해주고 싶었다는 것.
"2009년 여름에 하버드 일리노이 미시간 같은 미국의 큰 대학교수들이 한 달 동안 나를 방문했어. 김수영 시를 연구하다가 해독이 어려워서 막히는 부분이 많다는 거야. 아는 대로 설명해 줬더니 그때야 이해를 하더군." 김 여사는 남편의 시가 외국학자들에게까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뿌듯해한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이는 말. "수영이 49년에 내게 했던 프러포즈는 'My soul is dark'였어. 그것은 큐피드의 화살이었고, 그것을 맞은 나는 감전돼 버렸지. 내가 인기가 많았다 보니, 그가 떠난 후 참 많은 남자가 다가왔지만 수영이 꽂아 놓은 화살을 뽑을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는 최고의 시인이자 최고의 자연인이었어."
동아대 문예창작과 2학년 고경희 씨가 김수영의 시 '사랑'을 낭송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김 여사는 흡족한 표정으로 "흠, 그 시의 주인공이 바로 나야"라고 말해 좌중의 웃음을 끌어냈다. 그는 이어 "저쪽 방에 꾸며놓은 것을 '김수영의 서재'라며 구경하러 많이들 오는데, 사실은 서재가 아니야. 그저 쌓아놓았을 뿐이지. 진짜 서재를 만들어주는 것이 내 마지막 소원이야. 김수영 문학관을 마련해서 '김수영의 서재'라고 부르고, 관광지가 아니라 그의 사랑, 인도주의, 비판정신, 절대 자유의지 같은 정신들을 누구나 깊이 새기고 문학의 힘을 배우는 곳이 되면 더 바랄 것이 없겠어"라는 말을 던졌다.
서재에는 조병화 시인이 부러워했다는 널따란 김수영의 책상과 시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의 소재인 여덟 개 의자, 그가 쓴 원고와 시작노트, 쓰던 펜 사전 종이들, 아끼던 거울, 책, 그리고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한 시인의 사진 등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김 여사는 "진짜 김수영의 서재가 만들어지면 그때 꼭 다시 오세요"라는 인사말을 남겼다. 그는 부산에서 온 손님들이 고맙다며 김수영 시인의 장례식 당시 박두진 시인이 쓰고 읽었던 조시를 최초로 공개하는 친절도 베풀었다.
'김수영의 연인'을 만나 김수영의 문학과 그들 부부의 사랑이야기를 듣고 손때 묻은 시인의 유품들까지 직접 본 문학기행 참가자들은 인근의 장욱진 화백 고택과 백남준아트센터까지 둘러본 후 부산으로 향했다. 기념품을 전해 준 용인시청 관계자와 궂은 일을 도맡은 함동수 시인을 비롯한 용인문인협회 회원들의 친절, 신경림 시인의 신간 시집을 선물해준 부산 출신 손택수 시인의 온정까지 가득 안고 돌아오는 길은 넉넉했다.
# 아내가 꼽은 김수영 걸작 시는 도취(陶醉)의 피안(彼岸)
김현경 여사가 꼽은 김수영 최고의 시는 '풀'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었다. 그는 '도취(陶醉)의 피안(彼岸)'을 최고의 시로 꼽았다. '내가 사는 지붕 우를 흘러가는 날짐승들이/울고가는 울음소리에도/나는 취하지 않으련다'로 시작하는 8연 33행짜리의 이 시는 1954년 작품이다.
그는 "서정의 가락이 유창하게 늘어서 있는 문장이 특히 좋았는데, 명확한 의미가 선뜻 다가오지 않아. 그래서 물었더니 수영이 '사회주의에 대한 노스탤지어'라고 말했어"라고 회상했다. 해방 전후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사회주의 의식이 있기 마련이었다고 덧붙인 그는 "수영은 늘 자유에 목말라 했어. 특히 언론과 사상의 자유, 이 두 가지를 갈구했지. 비판의 자유가 없는 것을 못 견뎌 했어"라고 말했다. 그랬다. "김수영 정도면 문학관 하나쯤 있어도 괜찮은, 최고의 시인 아냐"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연인'은 시인의 자유정신을 가장 높이 사고 있었다. 사망하기 두 달 전인 1968년 4월 부산의 한 초청 강연에서 쏟아낸 그 유명한 연설문 '詩여, 침을 뱉어라'도 결국 이와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김현경은
-1927년 6월 14일 서울 출생
-서울 진명여고,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1942년 김수영과 운명적 만남
-1949년 김수영과 서울 돈암동에서 신혼살림 시작
-1968년 6월 16일 사별
-45년간 의상실 운영, 미술품 컬렉터 등을 하며 김수영의 시를 품고 삶
-2013년 3월 회고집 '김수영의 연인' 실천문학사에서 출간
▶주최=롯데백화점·부산문화연구회
▶특별후원=국제신문
▶참가문의=http://문학기행.kr (051)441-0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