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호 선수의 번트 장면.

'희생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야구처럼'. 이는 한 자동차 기업에서 만든 TV 광고의 마지막 문구다. 프로야구 원년,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투수의 연륜이 묻어난 내레이션과 함께 한때 일본 프로야구 선수로까지 뛴 대타자가 번트를 대며 선행 주자를 진루시키고 퇴장하는 장면은 잔잔한 여운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를 보며 문득 미국 프로야구의 강타자이자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한 선수가 머릿속에 겹쳤다.

레지 잭슨(Reggie Jackson). 그는 1960년대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21시즌 동안 통산 563개의 홈런과 1702개의 타점을 기록한 괴력의 슬러거였다. 게다가 1977년 뉴욕 양키스 시절 LA 다저스를 상대로 한 월드시리즈 6차전에서 무려 3연타석 홈런을 때려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았고, 또한 월드시리즈에 유독 강한 면모를 보여 '10월의 사나이(Mr. October)'란 별명이 붙기도 한 선수였다.

하지만 그의 이런 화려한 면모보다 더 멋지게 관중에게 기억되는 장면이 있다. 은퇴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옮긴 에인절스팀 시절, 4대 4 동점인 8회 말 무사 1루 상황에서 네 번째 타석에 선 그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플레이를 감행한다. 정확한 코스에 번트를 대고 주자를 무사히 2루에 진루시키며 이어 후속 타자의 결승타로 경기를 승리로 이끈 숨은 공신 역할을 한 것이다. 리그 지구 선두 팀과 반게임 차로 각축을 벌이는 상황에서 그 결과는 더욱 값졌다. 물론 그가 앞선 타석까지 부진하였다지만, 그의 명성에 비춰본다면 충분히 안타를 때려 팀을 구원할 영웅이 될 수 있었는데도 그는 무려 12년 만에 처음으로 희생번트를 대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런 대타자의 쉽지 않은 선택이 오히려 홈런을 펑펑 때려내는 모습보다 더 깊이 관중에게 각인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는 닭의 벼슬(Noblesse) 같은 위치에 있었지만, 노른자(Oblige)처럼 알을 낳는 닭의 사명에 충실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사회에 대한 도덕적 책무는 오늘날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덕목이다. 부와 권력으로 대변되는 사회 지도층들의 연일 터지는 비리와 범죄, 그리고 도덕적 불감증으로 이어지는 현 세태는 국민을 절망케 한다. 입버릇처럼 국민을 섬긴다는 정치인들과 소비자가 왕이라는 재벌 기업은 늘 야누스적인 모습으로 제 잇속을 챙기기에 혈안이다. 예전 광복 50주년을 맞이하며 한 일간지의 1면에 실린 사진이 기억난다. 사진 왼쪽엔 태극기가 집집이 펄럭이는 서울 강북의 낡은 연립주택의 베란다가, 그리고 오른쪽엔 강남의 화려한 고층아파트 창틈으로 빠짐없이 설치된 일본 위성방송 시청 안테나가 나란히 찍혀 있었다. 어쩌면 이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그대로 말해주고 있는지 모른다.

멀리 백년 전쟁 당시 영국에 끝까지 저항한 프랑스 칼레시(市) 여섯 지도자의 희생정신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 특권층들이 더 낮은 자세로 그들이 누리고 있는 만큼 일부를 다시 돌려줘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진정한 고귀함은 바로 4번 타자가 팀을 위해 희생번트를 대는 것과 같은 행동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부산 경원고 교사·현재 사회인야구 선수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