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메츠 선수 시절 R.A. 디키가 너클볼을 던지고 있다.

야구는 속도의 경기이다. 상대 팀보다 스피드 면에서 공이든 배트든, 아니면 발 모두가 빨라야 이길 수 있다. 투수는 상대 타자를 압도하는 강속구를 던져야 마운드에서 버틸 수 있고, 반대로 타자는 투수의 공을 이겨낼 수 있는 배트 스피드와 발 빠른 주루플레이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빠름과 빠름이 충돌하는 속성을 가진 야구, 0.1초 안에 승부가 결정되는 정치(精緻)한 스포츠이기에 심판도 베이스별로 따로 존재하는지 모른다.

이러한 빠름은 젊음과도 통한다. 물리적 나이로서의 젊음은 어떤 돌발적인 상황에도 기민하게 반응하며, 이겨낼 수 있는 개연성 또한 크다. 흔히 고교를 갓 졸업한 선수들이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바로 꿈의 무대인 프로야구로 곧잘 수혈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가 작용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들의 우상인 스타 선수들이 나이 들어 전성기를 보내고 속도의 경쟁에 밀리어 쓸쓸하게 은퇴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결국 야구에서의 빠름은 절대적 선(善)이요, 이와 달리 느림은 경계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느리다는 것이 오히려 낯설음으로 작용하여, 빠름의 패러다임에 오래오래 견뎌낼 수 있는 야구의 한 구질(球質)이 있다. 이른바 너클볼(knuckleball)이다. 일반적인 속구(fast ball)는 손가락으로 공의 실밥을 채어 회전을 최대화하여 가속을 시키는데 반해, 이 공은 오히려 손바닥에 붙여 던지므로 회전이 거의 없고 구속 또한 느리다. 게다가 공 주변의 공기 흐름이 솔기에 걸려 혼란스런 난기류가 되는 탓에 홈베이스 근처에서 예측할 수 없이 움직이므로 타자가 치기도 어렵고 투수 또한 원하는 곳으로 던지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이런 너클볼로 미국 메이저리그의 그라운드를 지배한 투수가 있다. 선수로선 이미 유통기한이 끝난 불혹에 가까운 나이, 프로에 진출하면서 투수로선 사형선고와도 같은 오른쪽 팔꿈치 인대가 없다는 것이 발견된, 그저 그런 평범한 볼을 던지는 투수로 오랜 무명의 시절을 보내야 했던 R.A.디키(Dickey). 그런 그가 지난해 20승 6패 평균자책점 2.73을 기록하며 233⅔이닝 동안 230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면서 너클볼 투수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사이영상을 수상했다. 빠른 공으로는 타자와 승부할 수 없는 열악한 조건의 노장 선수이기에 그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공, 하지만 느리기에 쉽게 난타당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는 피나는 노력으로 기존 너클볼을 뛰어넘는 공을 던졌다. 최근 그가 출연한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그는 말한다. "너클볼 투수가 된다는 건 죽었다 살아나는 걸 반복하는 겁니다. 하지만 절대 포기하면 안 되죠. 일단 공이 내 손에서 벗어나면 나머지는 세상에 맡겨야 하니까요."

여전히 세상은 브레이크 없는 무한질주 속에 빠름을 강요하고, 우리들 생은 이에 끊임없이 연소되어 가고 있다. 가끔씩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 그리고 옆자리를 천천히 둘러보는 느릿한 속도의 아름다운 해법을 너클볼로 자신의 삶을 바꾼 디키의 투구를 통해 한 번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부산 경원고 교사·현재 사회인 야구선수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