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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 낮달 /강성

일상에 지치고 무감각해져 아내와 쳐다볼 일이 없었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2-12-31 18:40:55
  • / 본지 4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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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한 지 벌써 두 달
함께 식사하기도 어려운
현재 내 삶에 섹스란 사치다

여자는 사무적인 음성으로
남편의 시신을 수습한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사랑해 아이까지 가졌던
부부 사이 였던가

무심코 비닐봉지를 머리에 썼다
봉지 손잡이를 목덜미에 묶었다
비닐봉지가 호흡에 맞춰
오그라들었다 부풀었다 했다
공기가 따스했다

교통위반 고지서가 날아들었다
신호위반 등 모두 18만원
내달 형편도 팍팍하겠다
당분간 아내에게 아이 얘기
끄집어내는 건 힘들 것 같다


아침 햇살이 방 안 깊숙이 들어와 어둠을 밀었다. 유리창 무늬를 관통한 두툼한 빛 몇 가닥이 침대 머리맡 사진액자에 닿았다. 필리핀 보라카이 해변에서 찍은 신혼여행 사진이다. 아내는 오늘 아침에도 다급하게 출근했는지 방안 곳곳에 흔적을 남겨 놓았다. 화장대 앞에는 화장품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고 휴지통 밑에는 화장을 닦은 화장 솜이 떨어져 있다. 나는 침대에 마구 널려진 옷가지를 주섬주섬 거두어 빨래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아내의 흔적을 따라다니며 정돈을 하고 침대 끝에 털썩 앉았다. 햇살을 따라 먼지들이 부유했다. 종아리가 욱신거렸고 귓속에 벌레라도 기어들어가 우는 듯 시끄럽고 빈혈기가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나는 양손으로 관자근을 주물렀다.



나는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다 재작년 졸업했다. 아르바이트하면서 더는 학생신분을 유지하기엔 부모님께 미안했고 대학에서 만난 지금의 아내와도 결혼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직장을 다니시는 아버지가 곧 정년이셨고, 내 학자금 대출 첫 상환 시기도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첫 대출을 할 때 4년 뒤 졸업을 염두에 두고 상환 시기를 넉넉히 잡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누군가 내게 고삐를 쥐어 잡아당기는 형세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A기업 하청회사에 취직하게 됐다. 비정규직이었지만 2년 후에 정규직원 전환을 약속으로 입사했다. 야간근무를 해야 하는 2교대 근무라는 것이 흠이었지만 대신 수당이 많았다. 그즈음 1학년 때 만나 핵융합이라도 할 듯 뜨거웠던 아내와의 관계는 시나브로 식어가고 있었다.

입사 후 6개월쯤 지났을 때 나는 아내에게 프러포즈했다. 사실 그날 우린 둘 다 취해 있었다. 나는 회사 입사 후 세 번째 회식 날이었고 아내 또한 친구들과 가볍게 한잔을 걸친 뒤였다. 회식이 3차로 이어질 듯한 분위기가 조성될 때 나는 홀로 술집을 빠져나왔다. 빙빙 도는 토요일의 번잡한 시내를 무작정 걷고 있는데 백설공주 복장을 한 여자가 나를 붙잡더니 꽃 한 다발을 건넸다. 나는 주저 없이 지갑을 열었다. 마침 택시가 내 앞에 섰고, 아내의 집 앞에 나를 내려다 놓았다. 도중에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아내 또한 집으로 향하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아내의 집 앞 텅 빈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며 아내를 기다렸다. 귀가하는 차들이 아파트로 쏙쏙 들어갔다. 뒷산에서 밤꽃 향기가 바람에 얹혀 내려왔다. 보름달이 눈부실 정도로 밝았다. 달을 보며 지난 인생과 아내의 얼굴을 몽글몽글 떠올리고 있을 때 놀이터 입구에 택시 한 대가 섰고 아내가 내렸다. 아내는 그네에 앉은 나를 발견하고 뚜벅뚜벅 걸어왔다. 정말이지 문득, '저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옆 그네에 앉자 나는 가져 온 꽃다발을 내밀었다. 아내는 설뚱한 표정을 지었으나 꽃다발을 건네받고 잠깐 향을 맡더니 그네 옆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우린 평소와 다른 분위기 속에 대화를 이어나갔다. 첫 만남 때처럼 그네 사이에 잠시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곧 느슨해졌다. 대화가 무르익자 나는 불쑥 "나랑 결혼해야 하는 거 아냐?"라고 고백 아닌 질문을 던졌다. 멀뚱히, 먼 달을 올려다보던 아내는 '그럴까'라고 대답했는데, 나는 아내의 '그럴까'라는 대답에 말꼬리가 올라갔는지 내려갔는지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몇 달 뒤 나와 아내는 결혼식을 올렸고, 여행사에 근무하는 고등학교 동기의 협찬으로 필리핀 보라카이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음모다. 붙박이장 앞에 음모(陰毛) 두 가닥이 떨어져있었다. 모가 짧고 가는 것으로 보아 아내의 것이다. 속옷을 갈아입다 빠진 걸 거다. 음모를 보자 욕정이 밀려들었다. 아내와 관계를 한 지 두 달이 넘었다. 일상에 지치고 서로 무감각해져 말똥말똥 쳐다볼 일이 없었다. 함께 식사하기도 어려운 현재 내 삶에 섹스란 사치다. 나는 바지를 내리고 성기를 쥐어 부드럽게 손을 놀렸다.

보라카이의 첫날밤. 봉긋 부푼 유방과 진한 허리선,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칼에서 풍기던 달콤한 오렌지 향, 성기를 짙게 덮고 있는 음모들을 쓸던 손끝의 자릿함이 떠올랐다. 이따금 아내는 새근새근 호흡을 귓가에 내뱉었다. 남자는 섹스를 귀로 한다고 했던가. 아내의 신음소리가 방 안을 달궜다.

금세 성기로 뜨거운 기운이 몰리고 누런 액체가 한 옴큼 쏟아져 나왔다. 대학 시절 등산과 체게바라를 좋아해 신혼여행은 안데스산맥으로 가고자 했다. AK47을 들고 안데스산맥을 누비던 그의 이상(理想)을 추종했다. 캠퍼스에서 지친 내 영혼에 활기를 넣고 싶었다. 마추픽추에 가면 잃어버린 내 청춘이 묻혀 있을 것 같았다, 왠지. 경제적 여건으로 계획들을 하나 둘 미루게 되면서 현재 나는 시든 성기를 들고 출퇴근만 반복하고 있다. 놀이터에서 아내를 기다렸던 청춘은 온데간데없이 아령칙하다. 아내 없는 빈방에서 자위를 일삼고 있다.

아침부터 자위했더니 몸이 나른했다. 주방에 가보니 싱크대에 아내가 담가놓은 설거지거리가 남아있었다. 냉장고에서 김치와 멸치조림을 꺼내고 밥솥에서 밥 두 주걱을 펐다. 한 숟갈 떴는데 푸석푸석한 사과를 씹듯 영 밥맛이 없었다. 밥을 먹다 시선이 자꾸 창밖으로 쏠렸다. 뭘까, 이 감정은? 고독을 알기에는 좀 이른 나이가 아닌가? 나는 남은 밥에 물을 붓고 후루룩 들이마셨다. 서랍에서 '저녁'이라 쓰인 위장약 봉지를 꺼내 입안에 털어 넣었다. 설거지하고 창밖을 내다보니 형이 1층 난간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 두 개를 꺼내 음식물 쓰레기통을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안 주무십니꺼?"

"어…… 아직 안 잤냐?"

나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와 형 옆에 앉았다.

"밥은?"

"대충 했습미더. 행님은요?"

"지금 묵고 있다아이가"

형은 손가락에 끼워 든 담배를 들어 보였다. 아침에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 밥숟갈을 뜨면 생쌀을 씹듯 입안이 텁텁하다. 그래도 난 새벽에 출근하는 아내가 남겨놓은 반찬으로 몇 숟갈 뜨고 잠자리에 드는 편이다. 퇴근하고 돌아와 아침에 혼자 밥을 지어 먹는다는 것이 여간 고달픈 일이 아니다. 형은 1년 전 이혼을 했다. 올해로 이 회사에 3년째인데 내가 입사하기 몇 달 전 이혼했다. 왜 이혼을 했는지 물어보진 않았으나 낌새로 보아 형수가 집을 나간 듯 보였다. 형은 전에 유통업을 하다 사업이 잘못돼 빚을 꽤 진 채 손을 턴 모양이었다. 아마 그 이유로 갈라섰을 것이다. 지금 사는 빌라에는 형의 소개로 들어왔다. 소문에 빌라에서 두어 사람 죽어 나갔다고 했다. 꺼림칙한 생각이 들었으나 월세가 주변 시세에 비해 많이 쌌고 출퇴근하기에 교통도 편리했다. 죽음을 왼손에 쥐고 사는 시대에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아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아 별 망설임 없이 결정을 내렸다.

"마누라는 출근했고?"

"예, 벌써 했죠."

"아~는 안 낳을 생각이가?"

"뭐, 생각 중입니다. 형편 좀 풀리면 낳을라고예."

"낳을 생각이면 빨리 낳지, 뭐한다고 고민이고? 형편이 뭐 겨울 지나면 봄 오듯이 그런다더나? 고민해봐야 늘 같다."

우린 이따금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망설였다. 딱히 경제적 이유만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현재 우리의 삶에 아이를 얹으면 행복이 배가 될 것인가에 확신을 할 수 없었다. 형이 남은 맥주를 들이켜 비웠다. 담배를 깊이 들이빨더니 하늘로 연기를 내뱉었다. 하늘에 여태 달이 희멀겋게 붙어있었다.

"미국이 달에다 기지 건설한대매?"

"그렇다네요. 좀 전에 뉴스 보니 발사 성공했던데요."

"달에서도 낮과 밤이 12시간인가?"

"14일 정도라카던데요."

"달에 가도 이럴라나?"

"14일 쭉 일하고 14일 쭉 쉬고 그러지 않을까예? 흐~, 근데 그때쯤이면 기계가 대신 일하지 않을까예? 행님."

"그럼 우린 놀고먹겠네. 태평성국이네. 흐~흐."

우린 맥주 한 캔에 취기가 도는지 실속 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이날 지구에서 발사된 아폴로 18호는 드리갈스키 분화구에 착륙했다. 아폴로 18호의 주 임무는 달기지 건설을 위한 탐사였다. 인류는 어디론가 나아가는 듯 보였지만 뚜렷한 목적지를 몰랐다.

골목 어귀에 부부로 보이는 노인 두 분이 들어섰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부축을 받고 한 손엔 지팡이를 짚고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오는 두 분을 보니 시간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긴 세월 수많은 시련이 두 분 사이를 관통해 갔을 텐데 지금껏 두 손 놓지 않고 함께 걷는 모습을 보니 울컥 가슴이 벅찼다.

"행님, 짠하네요."

나는 방금 말을 꺼내고는 아차 싶었다. 곁눈질로 형을 보니 표정이 어두웠다. 마침 벌레 한 마리가 내 왼쪽 운동화를 지나 형 오른쪽 운동화로 이동하고 있었다. 형이 운동화 앞꿈치를 들어 지나가던 벌레를 꾸욱 눌렀다. 엄지발톱만 한 놈이었는데 찌이익 유체가 짓이기는 소리가 샜다. 난 눈이 휘둥그레져 형을 쳐다보는데 형은 내가 옆에 있단 걸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형은 오른발을 뗄 듯 말 듯 앞꿈치를 살짝 떨었다. 그때, 형의 가랑이 사이로 눈물이 떨어졌다. 내가 놀라 고개를 들었는데,

"똥이나 싸고 잘란다. 어여 들어가라."

"아, 예… 형님."

형은 몸을 일으켰다. 돌아서 걸어가는 형의 뒷모습을 보니 어째 개운치가 않았다. 함부로 말을 건네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나는 멀뚱히 형의 뒤를 따랐다. 형과 한 발자국 남짓한 거리였는데 마치 강한 자기장의 영향으로 도저히 형 옆으로 다가설 수 없는 에너지가 감돌았다. 지난 1년, 작업대에서 형이 건넨 부품을 받아 다시 조립하고 했던 딱 그만큼의 거리였는데, 멀었다. 작업시간 정면으로 얼굴 한 번 쳐다볼 틈 없이 일하고 쉬는 시간이 되면 밖으로 나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애먼 달에다 담배 연기를 뿜어대면 형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자고로 밤을 지새운 사이는 그런 법. 그런 형의 등이 낯설었다. 형은 2층 계단에 올라서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휑하니 들어가 버렸다. 난 집에 들어와 침대에 벌렁 누웠다. 캄캄한 시공간을 둥둥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었다. 두 다리가 아렸다. 내 눈은 멀뚱히 천장 무늬를 따라다녔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초인종을 눌렀는데 인기척이 없었다. 몇 번 누르다 형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전원이 꺼져 있었다. 나는 먼저 출근한다는 문자를 보내고 빌라를 나섰다. 통근버스에 올라 회사 사람들과 눈인사를 건네며 빈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회사에 도착해 출퇴근기록기에 내 카드를 집어넣고 형의 카드를 꺼내보니 아직 출근 전이었다. 나는 탈의실에서 제전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휴대전화 전원이 꺼진 채였다. 메신저에 남긴 문자도 미확인 상태였다. 탈의실 입구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몇몇이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작업 교대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형은 나타나지 않았다. 조금 있으니 성 대리가 내게 와 형을 찾았다. 형이 집에 없었다고 하자 성 대리는 왼손에 든 서류철로 머리를 긁적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형 자리에는 사무실 송 주임이 배치됐다. 무뚝뚝한 얼굴로 분주히 손을 움직였다. 50분이 흘렀다. 우리는 일제히 손을 놓고 작업대를 벗어났다. 밖으로 나와 잔디밭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처음 이곳에 들어와 마트에 갔을 때 가전코너에 놓인 우리 회사 TV를 보고 뿌듯함도 들었다. 기판에 부품 하나를 인장하는 일이었지만 나름 자부심이 생겼다. 쉬는 시간 끝남을 알리는 멜로디가 울리자 화단가에 앉아 쉬던 직원들이 일제히 공장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자신의 작업대를 찾아가 부지런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좀 전 송 주임은 쉬는 시간 내내 줄담배를 피웠다. 그렇게 작업시간 50분이 또 지났다. 우리는 우~ 몰려나갔고 10분 뒤 멜로디와 함께 우~ 몰려들어왔다. 몇 번, 우~ 들락날락했더니 식사시간이 되었다. 이번에는 식당으로 우~ 몰려갔다. 차례차례 밥을 펐다. 다들 주간 조 때보다 밥 먹는 양이 적었다. 나도 밥과 반찬의 양을 조금씩 적게 담아 창가 식탁으로 가 앉았다. 앞에 앉은 형님이 말을 걸었다.

"형근이, 오늘 안 올 모양이네."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인 것 같지 않아 계속 밥을 먹었다. 몇 숟갈 뜨다 보니 양이 많아 보였다. 난 식판을 들고 일어나 음식 찌꺼기 통에 음식물을 쏟아버렸다. 음식 찌꺼기 통이 어느새 절반이 넘쳐 있었다. 나는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뽑아 화단가로 나갔다. '아침'이라 쓰인 위장약을 꺼내 커피 한 모금과 넘겼다. 물끄러미 밤하늘에 뜬 보름달을 올려다보니 야간초병 근무 때가 떠올랐다.

고향을 생각하다 보니 여자가 생각났다. 엄마를 생각하다 보니 여자가 생각났다. 복학을 생각하다 보니 여자가 생각났다. 여자가 생각나니 아내가 떠올랐다. 아내를 생각하니 나라를 지킨다는 사명감이 들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오른손에 든 소총을 바로 세워 잡았다. 지켜야 할 게 분명했던 시기였다.

오늘도 보름달이 머리꼭지에 걸려 있다. 야간 조가 되면 아침에 출근하는 아내와는 만나기 어렵다. 퇴근 후 집안의 흔적을 보면 아내의 동선이 그려진다. 한 날은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침대에 널브러져 있어 지각을 걱정했고, 한 날은 세탁기에 올려놓은 블라우스에 밴 알코올 냄새를 맡고 전날 회식이 있었음을 눈치 챘으며, 한 날은 꺼진 TV셋톱박스와 변기에 둥글게 내려앉아 있는 아내의 대변을 보고 정전이 있었음을 알았다. 대변에 지난밤 먹었던 콩장과 포도 씨 박힌 대변 색을 보니 아내는 건강했다. 지금 아내는 2인 베개를 끌어안고 깊은 잠에 빠져 있을 것이다. 아내를 생각하니 하루빨리 내 집이 갖고 싶었다. 아내가 노후를 대비해 연금보험을 붓자고 했다. 아내는 노후가 곧 오는 양 호들갑이었다. 매달 대출이자에 여기저기 생활비를 쓰고 나면 늘 바듯했다. 결혼 후 씀씀이를 줄인 아내를 생각하다 보니 지난달 몰래 현금서비스 20만 원을 대출받은 것이 미안스러웠다. 담배 연기를 보름달에다 뱉었다. 연기가 흐물흐물 오르다 흩어졌다.

'아~우~'

늑대가 울었다. 으음? 분명히 늑대 울음소리였다. 주위를 돌아보았다. 식사를 끝낸 직원들이 듬성듬성 화단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늑대울음을 못 들은 것일까? 다들 짐승 소리 따위에 관심 없다는 표정이었다. 식사 시간 끝남을 알리는 멜로디가 울리고 하나 둘 일어서 한 방향으로 몰려갔다. 처진 어깨에 고개를 반쯤 숙인 회색의 제전복들이 어슬렁어슬렁 동굴로 몰려 들어갔다. 멜로디가 끊기자 공장 밖은 금세 삭막해졌다. 동굴 입구에서 제전복 하나가 나를 향해 뭐라고 외쳤다. '아~우~'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려 슬렁슬렁 동굴 속으로 따라 들어갔다. 기계음과 환한 조명 아래서 다시 손을 놀렸다. 50분이 흘렀고 멜로디가 울리고 10분이 지나자 또 멜로디가 울리고 이렇게 여러 번, 조립 건물 창으로 햇귀가 기어들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웠다. 곧 교대시간이 왔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통근버스에 몸을 실었다. 휴대전화를 확인해보니 형에게 보낸 메시지는 여전히 미확인 상태였다. 빌라에 도착해 2층에서 형 집 초인종을 눌렀다. 길게 다시 한 번 눌렀으나 응답이 없었다. 난 3층으로 올라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어젯밤 아내는 머리를 감은 것 같다. 베게 주위에 떨어진 머리숱과 벤 자국이 남아 있었다.



침대가 축축했다. 벽시계를 보니 오후 5시였다.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다시 샤워했다. 샤워를 끝내고 식탁에 앉아 담배 한 대를 물었다. 꿈자리가 영 뒤숭숭했다. 형이 야산 아래서 양 떼를 돌보고 있었는데 늑대가 출몰해 양과 형을 물어 죽였다. 늑대에게 목을 뺏긴 형의 핏물이 야산을 뒤덮었다. 아무래도 꺼림칙한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밥이 완성됐다는 안내음성이 울렸다. 나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초인종을 눌렀다. 문 뒤에서 전해져오는 적막이 분명히 불길했다. 복도 끝 열린 창문으로 싸한 바람이 불어와 바닥에 떨어진 대출광고지들을 쓸어갔다. 현관문 너머 형이 있다는 동물적인 직감이 섰다. 나는 잠금장치 덮개를 올렸다. 1,2,3,4. 삐리리리. 0,0,0,0. 삐리리리. 둘 다 아니었다. 나는 경우의 수를 따져보다가 우연히 형 휴대전화 뒷 번호를 눌러보았다. 4,3,7,8. 삐~ 자물쇠가 풀리는 전자음이 울렸다. 천천히 현관문을 잡아당겼다. 입구에 형이 자주 신던 회색 운동화 한 켤레가 놓여있었다. 겨울 바닷가에 버려진 신발 같았다. 신발장 위 전원을 켰다. 나는 일순간 시선의 중심을 잡지 못했다. 유럽의 지하 사원에 발을 디딘 것처럼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냉장고 옆에 모아놓은 빈 소주병들이 눈에 띄었다. 고독을 비우고자 마셨을 형의 안쓰러운 얼굴이 눈에 밟혔다. 나는 형의 운동화 옆에다 신발을 벗어놓고 거실을 가로질러 왼편 방문을 조심히 열었다.

"행님~."

……언젠가 가부키에서 봤던가? 화장을 짙게 한 배우의 비현실적인 모습을 한 채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또렷한 얼굴의 윤곽, 오물에 젖어 말라붙은 침대 시트를 보니, 사흘 전 생사의 고락에서 벗어난 형이 실감 났다. 나는 휴대전화를 들어 침착하게 119를 눌렀다. 10여 분 뒤 구급요원들이 들이닥치고 시반을 확인하고 사망진단을 내렸다. 형은 이동 침대에 실려 구급차로 옮겨졌다. 그사이 동네 주민 몇몇이 몰려와 수군거렸다. 구급차 안에서 문득 그 아침에 만났던 노인 부부와 형이 짓밟은 벌레, 눈물을 훔치고 다급히 뒤돌아가던 모습이 이제야 예사롭지 않게 와 닿았다.

병원에 도착하고 얼마 뒤 형사 티가 유난히 나는 사내 둘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형사들은 날카로운 눈초리를 숨기지 못한 채, 내게 시신 발견시각부터 형과의 관계, 직장, 내 알리바이까지 캐물었다. 형사들이 경찰서로 동행해 달라고 요청했고 나는 자리를 옮겨 좀 전 했던 말들을 타자한 진술서에 지장을 찍고서야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경찰서 정문에 우두커니 선 채 발길을 잡지 못했다. 더위가 아스팔트에 내려앉아 도로포장을 하는 것처럼 후끈후끈했다. 마침 고가로 전철 두 량이 지나갔다. 승객이 없어 월요일의 놀이공원 모노레일 같았다. 민선 시장의 야심 찬 계획으로 완공되었는데 건설 전 수요예측조사에 미치지 못했다. 고가 뒤로는 초고층빌딩 터파기 공사가 한창 중이었다.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든다고 했다. 도시 전체가 하루가 다르게 변모했다. 언젠가 형이 집에 들어갔는데 그날은 늦은 시각까지 아이들이 깨어 있었다고 했다. 깬 모습을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낯설고 무척 커 보이더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경리가 전화를 받아 성 대리를 바꿔달라고 했다. 성 대리에게 형의 부고를 전하자 전화선 너머에서 불규칙한 날숨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성 대리는 내 근무일정을 조정해주었다. 나는 병원으로 발길을 틀었다.

경찰에서 연락이 갔는지 보호자가 나타났다. 청바지에 흰 셔츠를 입은 여성이 대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를 데리고 응급실 입구에서 형을 찾고 있었다. 나는 여자에게 다가가 형과의 관계를 설명했다. 여자는 형과 연락을 끊은 게 오래인지 아직도 그 빌라에 살았느냐고 되물었다. 여자는 내게 몇 가지를 더 묻더니 사무적인 음성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타인의 죽음을 대하듯 여자는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때 사랑해 아이까지 가졌던 부부 사이였다는 걸 믿기 어려웠다. 의사가 여자에게 약물에 의한 사망으로 보이며 정확한 건 부검 후에 알 수 있다고 했다.

부검 후, 형의 사인은 독극물 탓인 심장마비이며 경찰에서는 타살의 흔적이 없어 자살로 결론지었다. 빈소는 B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다음 날 오전 무렵 회사 부장과 송 주임이 회사대표로 다녀갔다. 형과 친한 직원 몇몇도 자신의 근무시간에 맞춰 들렀다. 눈들을 보니 밤사이 멜라닌 색소라도 빠졌는지 토끼 눈 같았다. 마치 출퇴근 기록기 앞에서 자신의 출퇴근카드를 찍듯 하고 서둘러 사라졌다. 장례식장은 대체로 스산했다. 향냄새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모락모락 올라가는 향 연기를 보니 줄담배를 피우던 형이 생각났다. 삼일 뒤 형은 근교 화장장에서 재가 되어 바다에 뿌려졌다.



   
퇴근길 통근버스에서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제산 거 알제?"

"벌써?"

"그저께 어머님께 전화 왔었는데, 어머님은 좀 일찍 알려주시지……."

"니는 메모 안 해놨나?"

"왜 짜증이고? 마트 갈 거제? 가면 화장지도 한 묶음 사온나."

나는 야간 조 때 기일이 돌아오면 마트에 들러 제삿술을 사 본가에 들렀다가 출근을 했다. 회사에 근무를 시작하고 첫 기일이 되었을 때 야간 근무 조였다. 주간 조 사람과 근무를 바꿀까도 생각했지만, 폐가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중간에 바꾸게 되면 일주일씩 맞춰 돌아가는 생활리듬이 깨지기 때문이다. 다들 이런 사정을 알기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근무 조정은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참석 못하겠다고 전했는데, 전화기를 바로 놓아버리셨다.

집에 와 샤워를 하고, 식욕이 없어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어 땄다.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창밖을 내다보니 구름 한 점 없이 파랗다. 오전인데 벌써 햇볕이 뜨거웠다. 인터넷 머리기사를 보니 오늘 낮 최고 기온이 31도였다. 창 아래를 내려다보니 엄마가 딸을 데리고 나와서는 노란 승합차에 태워 보내고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유치원으로 발걸음 하는 저 아이는 즐겁겠지? 헬륨가스를 머금고 산 듯했던 내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그땐 직장 생활 2년 정도면 학자금 대출 조기 상환도 가능할 것 같았는데, 결혼 후부터 잇새로 가스가 새는듯하다. 이대로 내 집 마련까지 가능한 것인가? 아득하다. 이 빌라 월세는 더 떨어질까? 담뱃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몸이 나른한데 쉬이 잠은 오지 않고 몽롱했다. 침대 옆 쓰레기 종량제 봉지가 눈에 띄었다. 나는 무심코 비닐봉지를 머리에 써 보았다. 봉지 손잡이를 목덜미에 잡아 묶었다. 비닐봉지가 호흡에 맞춰 오그라들었다 부풀었다 했다. 공기가 따스했다. 샤스스 샤스스 빗소리같았다. 시야가 희미했다. 몸 곳곳에 오련한 경련이 일었다. 귓가에 시골의 여름밤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외이도를 긁으며 고막을 넘었다. 이어 바람이 갈대를 쓸 듯 달팽이관을 돌아 측두엽에 앉았다.

삐~. 어둡다. 삐~. 오스스 할 정도로 많은 별이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삐~. 푸른 별 하나가 눈앞에 펼쳐졌다. 삐~. 검은 언덕 너머에서 폭풍이 일어나 고요한 사막을 한바탕 휘젓고 지나갔다. 삐~. 폭풍이 가라앉자 투명한 반원 안에 거대한 건축물 하나가 눈에 띄었다. 버즈 두바이였다. 앙상한 버즈 두바이 첨탑 끝에 침대 하나가 위태위태하게 걸려있다. 침대 위에 아내와 내가 알몸으로 누워 있다. 아내가 몸을 살짝 틀자 침대가 기울었다. 나는 재빨리 반대쪽에 체중을 실었다. 침대는 도로 수평이 됐다. 이번엔 아내가 내 배 위에 올라타 입을 맞추었다. 나는 놀라 눈으로 침대 끝을 응시했다. 아내는 내 아랫도리에 손을 짚고 천천히 허리를 놀렸다. 침대가 미동했다. 아내의 체중이 쏠리는 쪽으로 침대가 흔들렸다. 아내는 침대의 움직임에 아랑곳없이 섹스에 열중했다. 성기에 뜨거움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틀었다. 태양이 분화구 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저 멀리 별 하나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부딪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내는 등 뒤 별똥별을 보지 못한 채 황홀에 빠져 있었다. 요동하는 침대와 시시각각 다가오는 유성에 나는 기겁을 했다.

"야, 벼…별…."

"아…벼…별…."

아내가 앵무새처럼 내 말을 흉내 냈다. 아내의 몸이 마지막 지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야, 별똥별이라고"

그제야 아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몸이 월면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처럼 식어갔다. 놀란 아내 때문에 침대는 더욱 움직임이 커졌다. 슈우~웅. 쾅. 별똥별이 침대를 비껴 월면 크레이터에 떨어졌다. 그 충격으로 월축(月軸)이 흔들려 빌딩이 미동했다. 첨탑이 부러지면서 침대도 함께 추락하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828m의 높이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200m쯤 떨어졌을까?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데 갑자기 아내가 팔을 펼쳤다.

"야, 우리 날고 있어. 봐봐."

"니 눈에는 이게 나는 거냐?"

"팔을 이렇게 넓게 벌려봐."

"너 정신 나갔구나?"

"스카이다이빙 하는 게 소원이었는데 달에 와서 하다니."

아내는 빛보다 밝은 표정으로 깔깔거렸다.

"우리 곧 죽을지도 몰라."

"어때 죽으면. 소원도 이루고 당신도 옆에 있고."

"미쳤냐?"

"우리 손 잡자."

"너, 정말 미쳤구나."

"야."

"왜?"

"야"

"왜 불러?"

"사랑해~."

쿵.

비닐봉지가 침대 아래에 떨어져 있었다. 팬티며 침대 시트가 온통 젖어 있었다. 오후 3시였다. 샤워하고 1층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를 뺐다. 마트에서 제삿술과 아내가 부탁한 화장지를 사 차에 실었다. 정오가 지난 지 한참인데 열기가 수그러들지 않았다. 에어컨 손잡이를 최고로 돌렸다. 시간을 보니 본가에 갔다 오려면 서둘러야 했다. 가속페달에 힘을 실어 속도를 높였다. 엔진에 무리가 가는지 80㎞가 넘지 않았다. 불볕더위로 거리가 한산했다.



"저 왔어요."

엄마는 제사에 올릴 생선을 손질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거실 소파에 앉아 나를 힐끔 쳐다보시고는 계속 TV를 보셨다.

"술은 동네 슈퍼에서 사도 되는데 니는 바로 출근하지 그랬나?"

"제사에 참석도 못하는데 잠시라도 들러야죠. 할 거 많죠? 윤이라도 있으면 수월할 텐데."

"우야겠노 둘 다 돈 번다고 바쁜데. 인자 좀 간단히 지내고 하면 될낀데, 손 하나 까닥 안 하면서 너그 아버지는 뭔 고집인지……."

엄마는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내심 서운해하셨다. 내가 제사에 참석 못하는 것보다 아마 윤이가 미리 와 제수음식 장만에 손을 보태지 못함에 더 실망이 크실 것이다.

"윤이 오면 하게 좀 놔두세요."

"걔도 일 끝나고 오면 힘들고 그때까지 기다릴라카믄 너무 늦다. 그래 윤이는 뭔 소식 없고?"

"아직 없어요."

"이런 날 애 웃음소리라도 들리고 하면 너그 아버지 안색도 누그러지실 텐데."

"……생기겠죠."

엄마에게 차마 임신을 미루고 있단 걸 밝힐 수 없었다. 옛말에 자기 먹을 건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지만, 것도 제 그릇이 있어야 가능한 사회였다.

"요즘은 제사상 차려주는 데도 있."

"뭐라카노 누가 제사상을 차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지킬 건 지켜야지. 어이구 제삿날 한다는 소리하고는……."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시선은 TV에 둔 채 처음부터 모자지간 대화를 엿듣고 계셨다.

"엄마야 힘드니까 그냥 한 소리죠."

아버지께 입도 벙긋 못했던 나는 결혼 후 이따금씩 대들었다. 또 오늘 같은 날 주방에 한 발자국도 들이지 않는 아버지가 미웠다.

"뭐라카노 이눔아가. 며늘아라도 일찍 오면 너그 엄마가 이래 고생하나?"

"갸가 어디 일부러 안 옵니꺼? 일을 못 빠지니까 그러는 거 아입니까, 아버지도 엄마 좀 도와주면 좋잖아요."

"출근해야 안 되나 어여 가거라."

부자지간에 다툼이 날 것을 걱정한 엄마가 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니는 장손이라는 놈이 매번 제사에 빠지고."

"당신도 그만하소. 야가 어디 안 오고 싶어서 그라요."

엄마는 내 등을 떠밀며 갈 것을 재촉했다. 나는 엉거주춤 신발 끈도 제대로 묶지 못한 채 현관문을 나섰다. 아버지와는 늘 이런 식이었다. 엄마는 이런 부자 사이를 늘 염려했지만 이제 와 새삼 지난날 멀어진 거리를 좁힌다는 것도 영 쑥스럽고 불편하게 생각되었다.



밀폐된 차 안은 한증막 같았다. 나는 차를 험하게 몰아 아파트단지를 빠져나왔다. 간선도로에 진입하려고 신호 대기선에 섰다. 주차장을 나오면서 켜뒀던 에어컨은 여태 더운 바람만 풀풀 내뿜었다. 나는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내렸다. 옆 차선에 검은 세단이 와 천천히 섰다. 빛가림이 짙어 차량 안이 보이지 않았다. 검은 차장에 비친 내 얼굴이 못나 보였다. 얼굴 근육을 위아래로 움직여 보았다. 검은 세단의 차창이 내려가더니 스포츠머리를 한 남성이 얼굴을 내밀었다.

"뭘 봐?"

뜬금없었다. 저 사람이 시비를 거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더위를 먹었든가. 가슴속에는 좀 전 아버지와 다툰 감정의 찌꺼기가 부유하고 있었고 날씨도 무더웠다.

"왜, 보면 안 되냐?"

"뭐? 이 새끼야. 너 뒤질래?"

"그래, 뒤질란다. 이 새끼야."

생면부지의 사람과 만나 나누는 대화치고는 무척 거칠었다. 저 사람도 어딘가에서 앙금을 갖고 온 것일까? 자세히 보니 상대방 인상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장례식에라도 다녀오는 길인지 검은 양복을 걸치고 있었다. 차내 시계를 보니 출근 시간이 가까웠다. 대거리가 길어질까 싶어 얼른 사과하고 무마할까라는 생각이 언뜻 스쳤지만, 이미 험한 말이 한 번 오갔고 쉬이 사과를 받아줄 인상도 아니었다. 물고 물리는 세상, 이럴 땐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이 상책. 나는 오른손 중지를 치켜세우며 노려봤다. 내 중지를 본 검은 양복은 사이드 기어를 잡아당겼다.

"야, 너 잠깐 내려 봐."

차 문을 열고 나온 검은 양복의 상체는 예상외로 컸다. 마치 몸을 움츠리고 사냥을 준비한 육식동물 같았다. 검은 양복이 태양을 등지고 서 내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검은 양복의 흰 와이셔츠 안으로 푸른 문신이 엿보였다.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나는 물리는 쪽이며 지칠 때까지 뛰어야겠구나 하고. 나는 서둘러 차창을 올렸다. 때마침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사이드 기어를 내리고 재빨리 기어를 변경했다. 차 보닛을 돌던 검은 양복이 나의 신속한 행동에 멈칫하더니 다시 차에 올라탔다. 나는 가속페달을 꾹 밟았다. 룸미러로 보니 검은 양복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받은 듯했다. 검은 세단도 속력을 높여 나를 뒤쫓기 시작했다. 나는 서행하는 차량을 요리조리 피하며 내뺐다. 검은 양복도 무서운 속도로 나를 뒤쫓았다. 우린 자동차 경주를 하듯 시내를 질주했다. 저속의 차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다들 내 다급함은 안중에 없이 느릿느릿 제 방향만을 향했다. 간간이 미등을 켠 차들이 보였다. 붉은색·하얀색·푸른색의 빛들이 어우러져 선(線)을 이루었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 빛들이 공간에서 산란했다. 그때, 전방 좌측에 동굴이 보였다. 빛들의 고향?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안구에 힘을 주었다. 빛들이 제자리를 찾았다. 나는 핸들을 황급히 돌렸다. 나는 학원 건물로 보이는 반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 승합차 뒤쪽에 숨었다. 곧 검은 세단이 횡 주차장 입구를 지나쳐 갔다. 골목으로 길을 튼 내 생각이 주효했다. 그제야 발목에 긴장이 풀렸다. 한숨이 나왔다. 안전띠를 한 아랫배에 압박감이 심했다. 오줌이 마려웠다. 주위를 살펴보니 주차장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승합차 뒤로 가 벽에다 대고 오줌을 눴다. 굵은 오줌발이 벽면에 부딪혀 바지에 튀었다.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떨어진 오줌줄기가 승합차 밑으로 들어가 주차장 입구로 흘러내렸다.

나는 주차장 밖을 한 번 확인하고는 도로로 나왔다. 좁은 골목을 벗어나 간선도로에 접어들어서야 안심이 됐다. 산 위로 떨어진 해는 조금씩 자취를 감춰가고 있었다. 노을이 초식동물의 선혈처럼 번졌다. 도로는 퇴근시간에 접어들어 차량이 늘어나 있었다. 나는 간간이 백미러를 훔쳐봤다. 어둠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달이 퍼런 하늘에 허옇게 떠 있었다. 나는 속력을 올렸다. 고속도로에 접어들자마자 전방에 동물 주검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핸들을 살짝 틀어 비켜갔다. 육체에서 분리된 내장들이 짓눌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꼬리의 모양으로 보아 고양이였다. 저 고양이는 먹이 하나 없는 아스팔트에 무엇 때문에 발을 내디딘 것일까? 고속도로를 건너기에는 꽤 멀었을 텐데, 맞은편에서 암고양이라도 본 것일까?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아내였다.

"나 지금 마쳐서 어머님께 가고 있어. 당신 갔다 왔어?"

"응."

"별말씀 없으시지?"

"응."

"출근 중이야?"

"응."

"더 사갈 건 없지?"

"응."
"집에서 뭔 일 있었어?"

"아니……, 윤이야?"

"왜?"

"우리 애 가질까?"

"……갑자기 뭐래? 미쳤어?"

"너 일 나가면 엄마도 좀 봐주실 테고, 애 하나 키우."

"끊는다. 나 버스 내려."

끊긴 전화음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차량은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라디오에선 청취자 신청곡으로 '5월에 떠나버린 사람'이 흘러나왔다. 해는 산 뒤로 기울고 낮달은 조금씩 빛을 냈다. 한반도의 동쪽을 관통해 온 강물이 바다로 흘러나갔다. 수백 마리의 까마귀 떼가 강 끝 모래섬에서 날아올랐다. 새들이 수평선을 따라 비행하더니 해를 따라 산 능선을 넘어 자취를 감췄다.



일 주일 후 아폴로 18호가 지구로 귀환해 환영받던 그날 집으로 교통위반 범칙금 고지서가 날아들었다. 속도위반에 신호위반, 중앙선 침범까지 모두 18만 원이었다. 섬뜩 아내의 얼굴이 스쳐 지났다. 다음 달 형편도 팍팍하겠고 당분간 아내에게 아이 얘기 끄집어내는 건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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