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홀바인 2세가 '우신예찬' 초판에 그려 넣은 삽화(왼쪽)와 한스 홀바인 2세가 그린 에라스뮈스 초상. 저자는 에라스뮈스를 인본의 방식으로 산 대표적 인물로 꼽았다. 네이버 제공

- "이념의 역사는 오해의 역사"
- 이데올로기 태동기에 주목

- 역사-끝에서 두번째 세계
-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지음
- 김정아 옮김/문학동네/2만 원

아웃사이더(국외자). 기성의 사회 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사상을 지니고 행동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역사상 이 말에 어울리는 삶을 살았던 지식인은 많다. 하지만 독일 출신의 철학자·사회학자·영화학자·소설가인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1889~1966년) 만큼 어떤 학파나 당파, 사상적 범주에도 묶이길 거부하며 철저한 정신적 유목민을 고집했던 지식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사무직 노동자 계급의 생활양식과 문화를 비판적으로 고찰한 사회학 연구서 '사무직 노동자'와 영화라는 매체의 형식적 특징들이 어떤 의미에서 현실의 구원에 유리한지를 논한 영화 연구의 기념비적 저서 '영화 이론' 등 여러 학문 분야에서 많은 명저를 발표했지만 학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또 군대와 애국주의, 전쟁에서 도망치려고 고군분투하는 희극적 인물을 그린 자전적 소설 '긴스터'를 써 호평을 받았지만 익명으로 출판할 수밖에 없었고,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 사람들과 오랫동안 교류했지만 함께 엮여 정리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만년에 '역사'라는 주제에 매달려 마지막 연구의 불꽃을 태웠다. 그렇게 탄생한 옥고를 그의 사후에 친구가 책으로 펴낸 게 이번에 국내에 번역된 '역사-끝에서 두번째 세계'다. 이 책은 그의 다양한 지적 여정을 아우르는 핵심 저술이다. 그가 생각한 역사는 무엇일까. "이념의 역사는 오해의 역사다"(23쪽)라는 명제에서 그의 역사관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모든 이념은 세상을 거치면서 조잡해지고, 납작해지고,일그러진다고 봤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이데올로기의 태동기, 즉 기독교가 그리스·로마 세계에 최종 정착하기 직전의 시대나 종교개혁 직전의 시대, 공산주의 운동 직전의 시대를 주목했다. "상충하는 대의들 가운데 어느 것도 최종적 쟁점의 최종적 결론이 아닐 가능성, 우리로 하여금 대의 없이 사유하고 생활할 수 있게 하는 사유·생활방식이 있을 가능성"(24쪽)이 있는 시대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데올로기적 제약에서 탈피한 이런 사유·생활방식을 '인본의 방식'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인본의 방식으로 산 대표적 인물로 종교개혁에 찬성하면서도 종교분쟁에는 반대하며 평화를 추구해 구교도와 신교도 양측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1466~1536년)를 꼽았다. "에라스뮈스가 가는 길은 중도 또는 중도라고 보는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타협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평화의 도래를 가로막는 대의들을 제거하겠다는 철저한 비타협적 시도"(30쪽)였으며, 그런 측면에서 토마스 모어의 진정한 친구라고 했다. 이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이상만이 영원한 회귀성을 갖기에, 에라스뮈스의 이상은 평가절하되지 않는다"는 전기작가 스테판 츠바이크의 평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철학이나 신학이 '맨 끝의 세계'라면, 역사는 '끝에서 두번째 세계'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삶의 진실은 최종 의미에 다다르지 못한 채 잠정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후자 쪽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추구하는 역사 연구의 목표는 "역사가들의 특별한 사유양식들을 재정의하고 복권시키는 것"이다. "역사 영역에서 작동하는 핵심 범주들이 철학 전통 탓에 오래 전부터 가려져왔기"(230쪽) 때문이다. 그는 이 틈새 영역을 '대기실'이라고 명명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대의나 이념, 이데올로기의 구속에서 해방된 날것 그대로의 역사적 현실을 오롯이 만나게 된다. 그 만남은 미지의 시·공간을 탐사하는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승화된다. 어떤 지식인에게서도 볼 수 없는 저자만의 가치와 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