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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미술의 거장 이우환 작가는 "화가는 알고 있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알고 있지 않은 것을 건드린다"며 혼이 깃든 예술을 강조했다. 임은정 기자 |
1900년대 초반, 마르셀 뒤샹은 한 전시회에서 '샘 Fountain'이라는 제목의 남성용 소변기를 출품하면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무한대의 자유로운 발상을 선보이며 현대미술의 시작을 연 뒤샹은 프랑스 출신의 미술가다.
뒤샹의 뒤를 이어 현재 유럽에서는 프랑스와 함께 독일, 영국, 이탈리아 등이 현대미술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현대미술의 거장들을 통해 현대미술의 오늘과 내일을 살펴본다.
- 이슈 보다 삶 담아낼 수 있어야
- 결국 혼에 닿는 작가만 남을 것
- 알고 있지 않은 것 건드리기에
- 모든 예술이 철학보다 위대해
- 미대 관두고 일본 안 갔다면 미술 아닌 문학하고 있을 것
- 돈은 와인 즐길 정도면 충분
- 작품 제작·전시 줄여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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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우환의 '관계항'. 국제신문 DB |
거장을 만나러 가는 길은 다소 긴장됐다. 워낙 낯선 사람을 꺼려하는 성품 탓에 혹여 어색한 만남이 되지 않을까라는 걱정에서였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최고의 현대미술 거장으로 존경받고 있는 이우환(76) 화백을 만났다. 지난 18일 오후 7시(현지 시각), 파리의 한국인 식당 '우정'에서 그를 만난 4시간 30분 동안은 단순히 화가가 아닌, 세계의 석학을 만나고 있다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이 화백이 누구인가. '점 선 면'으로 대표되는 미니멀리즘의 대가이자, 한국 출신 작가로는 백남준에 이어 두 번째로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2011년)을 연 인물이다. 서울대 미대를 2개월 만에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철학을 공부한 뒤 1970년대부터 만드는 것의 최소화를 통해 사물과 사물, 사물과 공간, 공간과 사람간의 관계와 울림을 말하는 '모노하(物派)' 운동을 이끌었다.
우려와 달리 거장은 여러 이야기들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술술 풀어나갔다. 수수한 점퍼에 청바지를 입고 식당에 나타난 그는 와인 이야기로 시작해 소 먹이던 어린 시절부터 일본에서의 가난한 유학생활, 그리고 평생 소원이었던 소설가가 아닌 화가의 길을 걷기까지 70여 년 세월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이 자리에는 이배(한국 이름 이영배, 프랑스에서는 이배라는 이름으로 활동) 작가, 프랑스에서 평론가이자 전시기획자로 활동하는 김수현 씨, 갤러리 604 전창래 대표 등이 함께했다.
지난 20여 년간 매년 유럽에서 7개월, 일본에서 5개월씩 보내며 작품활동을 해온 그는 최근에는 미국(2개월)으로 활동 반경을 넓혔다. 작가는 파리 생활에 대해 "맘이 편하다"며 "일본은 일상생활의 잡일이 많다. 편할 수가 없다. 물론 가족이 있어 안심되는 일도 있다"고 답했다.
이 화백은 나이가 들면서 작품 제작과 전시를 줄이고 있다는 근황도 밝혔다. "지난해 구겐하임 전부터 작정하고 줄여나가고 있다. 패턴이 비슷한 작업이다보니 맨날 똑같은 것 하고 있다는 소리 듣는 것도 싫고. 하지만 똑같지가 않다. 내면은 다르다. 전시를 줄이는 건 생각을 깊게 정리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외람되지만 작품은 내놓으면 팔린다. 그런데 이 나이에 밥 먹고 와인 마실 만큼만 하면 되지 싶다. 파는 것에 대한 욕심이 없다." 작품만큼이나 사랑한다는 와인을 마실 정도면 만족한다는 것, 이미 물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하지만 젊은 작가들에게는 경계의 말을 던졌다. "젊은 사람들은 나같은 발상 하면 안 된다. 죽을 둥 살 둥 난리를 떨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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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우환의 '점으로부터'. 국제신문 DB |
사람들은 곧잘 '점'하나 찍고, 선을 긋거나, 돌 덩어리를 갖다 놓는 그의 작업에 대해 '도(道)'를 이야기한다. 정작 작가는 "'도'를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더불어 '넘버 1, 최고'라는 말에 대해서도 질색했다.
이 화백은 "근대미술이 100% 머리 안에서 짜서 나왔다면, 현대미술은 어떤 상황과 공간을 생각해서 만들고 연계시킨다. 내외부의 연계고리를 찾는 것"이라며 명쾌하게 둘의 차이점을 정의내렸다. 조각 작품이 바로 그렇다. 작가는 작품이 놓이는 장소적 특성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작품을 변형시킨다. 테이블 위에서 만들어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협의해 만드는 것이다. 그 상황, 그 장소에서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는 그림에서 정치를 읽어내기도 했다. 식민지, 제국주의로 점철된 근대는 큰나라가 풍속, 언어, 이름을 바꾸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콘셉트로 캔버스에 모든 것을 밀어넣는다면, 현대는 제각기 서로 다른 생각이 공존하는 가운데 옆나라, 옆사람과의 관계를 조율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1970년대 모노크롬(작가는 '단색화'로 불렀다) 회화를 이끌었던 그는 "꽁꽁 얼어붙은 사회에서 허용되는 건 과격화된 추상화뿐이었다"면서 "일부러 의도를 가진 게 아니고 자기도 모르게, 자기 밑바닥에서 나타나게 하는 것, 그것이 최고의 작가"라고 강조했다. "1970년대 작가 태반은 가난했다. 6·25를 겪고 여러 가지가 몸에 뱄다. 나름대로 어쩔 수 없는 힘을 가졌고, 그것이 존재성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한국 현대미술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다양성은 태반이지만 머리로 하는 작업으로 변했다. 빛 보는 작가가 많지만 어떤 게 남을 것인가 묻는다면 상당수 무릎을 꿇을 것이다. 머리로 싸맨 작가는 간단히 잊혀진다. 왜? 삶이 담겨 있지 않아서다. 이슈만 있어서다. 한국의 70년대 작가가 중요한데, 가슴 속에 와 닿는 부분이 있었다. 앙드레 말로의 말을 빌리자면 '혼에 닿는 작가만이 남을 것'이다." 신념에 찬, 강렬한 메시지였다. 작가와 화랑의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는 주문도 했다.
와인을 한두 잔 들이키면서 거장의 이야기는 어느덧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경남중학교(경남 함안 군북 출생)를 졸업한 뒤, 학교명도 모른 채 남녀공학이라는 팻말에 끌려 들어간 서울사대부고(6·25 전쟁 중 부산에 내려와 있었음)와 원했던 서울대 문리대 대신 들어간 미대에 도통 흥미가 없었다는 것. 일본에서 구두닦이, 가정교사 등을 하면서 학비를 벌다가 가장 손쉬웠던 그림을 그리고 팔며 생활했던 사연 등등.
"한국에 있었으면 100% 문학을 했지 미술은 안 했을 것"이라고 단언한 작가는 눈에 보이는 것을 잘 그렸다, 못 그렸다 하는 것은 2류, 3류식 구분이라며 "화가는 알고 있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알고 있지 않은 것을 건드리기에 화가다. 미술 음악 문학 등 모든 예술이 어떤 철학보다 위대한 이유이기도 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은 우주와 연결된 원시적 생명(카오스)에 가장 관심이 간다고 말하는 대가의 쉼 없는 열정에 파리의 밤도 지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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