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정신과 지식인 /김호기 지음 /돌베개 /1만4000원
캄캄한 밤에 길을 잃으면 목동들은 반짝이는 북극성을 보고 길을 찾는다. 우리 사회가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북극성 같은 좌표 역할을 하는 게 '시대정신'이다. 시대정신은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가치의 집약이다.
오는 12월 19일 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오늘의 시대정신이 무엇인가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시대정신과 지식인에서 올해의 시대정신은 '복지'와 '통합'이라고 대답한다. 박정희 시대의 '산업화'와 김대중·노무현 시대의 '민주화'에 이어 '복지국가'로 나가야 한다는 얘기다. 통합 역시 급속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쌓인 양극화, 사회 갈등 같은 부작용을 해결하자는 뜻이다.
이 책은 시대정신과 지식인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삼국시대 원효 대사, 고운 최치원부터 조선시대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을 거쳐 대한민국의 박정희,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역사적 인물 24명을 조명한다. 박정희,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식인이라기보다 정치가였지만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시대정신을 구현한 상징적 인물이어서 포함됐다. 학문과 현실, 우리 역사를 넘나드는 저자의 치열한 고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독자에게도 스스로 시대정신을 성찰할 기회를 제공할 것 같다.
한국사의 지식인 계보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우리 역사를 대표하는 지식인과 정치가는 시대정신 탐구의 최전선에서 고투해왔다. ▷골품제에 맞서 싸운 최치원 ▷민족의 역사를 체계화한 김부식과 일연 ▷유고적 개혁을 꿈꾼 정몽주, 정도전, 이황, 이이 ▷그 유교사회를 혁신하고자 했던 박지원, 박제가, 정약전, 정약용, 이건창, 최제우 ▷근대적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모색한 서재필, 신채호, 이광수 ▷존재의 의미에 질문을 던진 원효와 경허 ▷현대적 산업주의와 민주주의, 인간주의와 생명주의를 추구한 함석헌, 장일순, 황순원, 리영희, 박정희, 노무현이 그렇다.
이들 인물을 관통하는 코드는 '개혁과 통합'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어느 시대건 사회 개혁과 통합은 그 사회에 부여된 이중적 과제다. 보수와 진보의 배타적 독점물이 아니다. 보수는 보수대로, 진보는 진보대로 개혁과 통합의 프로그램을 제시하며 경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저자는 "21세기 우리 사회 미래를 이끌 새로운 시대정신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면 ▷함석헌과 노무현의 민주주의 ▷박정희의 산업주의 ▷리영희의 민족주의 ▷장일순의 생명주의 ▷황순원의 인간주의 등이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함석헌이 1958년 '사상계'에 발표한 씨알사상은 민주주의의 기초로서 시민의 중요성을 부각한다. "나라의 주인은 고기를 바치다 바치다 길거리에 쓰러지는 민중이지 벼슬아치가 아니다. 구원은 땅에 쓰러져도 제 거름이 되고 제 종자가 되어 돋아나는 씨알에 있지 그 씨알을 긁어먹는 손발톱에 있지 않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모색하기 위해 지식인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나. 저자는 "생산적 자기 부정, 치열한 대안 모색, 개혁과 혁신의 프로그램 구체화 등 세 가지 책무가 필요하다"고 제시한다. 시대정신에 관심이 더 있다면 조만간 나올 저자의 '새로운 시대정신을 찾아서:산업화, 민주화, 복지국가'를 읽어보는 것도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