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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생들이 초록빛 숲에서 책을 읽으며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 독서와 자연은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진우 인턴기자 |
- 음악영화제 참가로 영화치료나
- '나만의 리스트' 속 간접 체험을
- '마음에 관한 책'으로 독서치료도
샐러리맨 김고충 씨는 오랜만에 웃었다. 방금 교통카드에 3만 원을 충전했기 때문이다. 전철 1량을 통째로 산 듯 뿌듯하다. 정말이지 이런 건 드문 일이다. 교통카드 충전은 언제나 1만 원이 최고액이었다. 살다 보니 이렇게 흐뭇한 순간도 있긴 하다.
하지만 김고충 씨의 고충은 오늘도 계속된다. 사느라 언제나 노고가 많은 친구 이노고 씨가 툭 던진 말이 요즘 특히 신경 쓰인다. 긴말도 아니었다. "벗어날 수 없어!" 사실 김고충 씨도 이걸 느끼고 있던 차였다.
영문도 모른 채 의금부에 끌려가 하소연 한 번 못해 보고 망나니의 칼에 참수당한 조선시대 죄수의 원혼이 하필 김고충 씨의 은행잔고로 환생이라도 한 것인지, 엊그제 월급을 받은 것 같은데 통장은 언제나 단칼에 베여버린 몰골이다.
실적을 올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상사는 갈군다. 롯데 자이언츠가 상대팀을 '떡'으로 만드는 걸 볼 때 잠깐 기분이 좋아지지만, 다음 날 출근하면 똑같다. 잘 살아보겠다고 노력하는 이상, 벗어날 수 없다. 달궈놓은 프라이팬에 던져진 각얼음처럼 불안만 커진다.
김고충 씨와 이노고 씨는 탈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꾸 지쳐가는 것도 문제고, 경쟁의 이름 아래 남에게 상처 주고 사람한테 상처 받는 것도 지겹고 아프다.
■힐링, 어디까지 가봤니
고충 씨와 노고 씨가 주위를 둘러보니, 치유 또는 치료를 뜻하는 힐링(healing)이 유행을 넘어 대세다. 반가웠다. "아! 우리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그래서 친구들한테 물었다. "힐링, 해보니 어때?"
뜻밖에 반응이 싸늘한 친구들도 있다. 1980~1990년대 대학을 다녔던 남성들은 "힐링은 근본적 해결책이 못 돼"라 말하곤 했다. 사람을 다치게 만드는 사회구조는 그대로 두고 상처만 닦아내면 무슨 소용이냔 거다. 고충 씨와 노고 씨는 조금 답답해진다.
고충 씨가 말한다. "먹고 살겠다고 요리를 하다 칼에 손을 베인 사람은 병원 가서 치료(힐링)를 받아야지. 손가락 치료한다고 암세포나 당뇨증세까지 '근본적으로' 치료는 되는 건 아니라도, 일단 나아서 생활을 해야잖아, 생활을! 라이프 머스트 고 온(Life must go on-팝송 제목)!" 노고 씨가 보탠다. "모르지! 사람들이 치료만 받다가 '다치게 하는 사회구조를 바꿔야지 치료만 받아갖곤 안 되는 거구나'하고 느끼면 함께 들고 일어날지."
그래서 두 사람은 스스로 힐링을 찾아나서기로 한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곤 하지만, 바쁘고 가난해서 멈출 짬이 없는 고충 씨와 노고 씨는 '가까이 있는 힐링, 생활 속의 치유'부터 찾고 싶다. 바로 힐링의 책, 힐링의 영화다.
■JIMFF의 열기 속에서 느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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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기간인 지난 14일 충북 제천시 청풍호반무대에서
영상과 음악이 어우러진 '원 썸머 나잇-레전드 나잇'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제공 |
고충 씨는 힐링의 영화를 찾기 위해 지난 9~15일 열린 제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JIMFF) 현장부터 찾아갔다. 부산에서 직행시외버스를 타면 5시간이 넘게 걸리는 깊은 곳에 충북 제천이 있다. '음악영화' 그리고 '음악과 영화'가 넘쳐나는 JIMFF는 마음의 힐링에 딱 들어맞는 작은 영화제였다.
고충 씨는 제천시내와 청풍호반에서 펼쳐진 JIMFF에서 마음이 조용해지고 감수성에 새살이 돋는 체험을 했다. 세르비아의 작은 집시마을에서 펼쳐지는 세계 최고의 트럼펫축제를 다룬 단편 '구차-트럼펫페스티벌'(감독 올리비에 쿠스티옹)이나 한 천재 기타리스트의 아프고 아름다운 삶을 그린 장편 '제이슨 베커'(감독 제시 바일) 같은 영화가 워낙 좋기도 했다. '내 남자친구는 대머리'(감독 마리아 복)라는 단편은 제목만 듣고도 치유가 됐다. 30대초부터 대머리 신세인 고충 씨는 그 고충을 정말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충 씨는 생각했다. "여기에 와서 내가 치유되는 느낌을 받은 건, 내 마음의 상처를 내가 인정하고 그걸 낫게 해보려고 직접 먼 길을 달려온 결단과 실천 때문이었을 거야." 말하자면, 힐링은 자신의 문제를 자각하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준비하는 경우에 작동한다는 것이다.
힐링의 영화를 '영화치료'(cinematherapy)라는 영역으로 한정하면 생각보다 엄격한 조건을 만나게 된다. 한국영상응용연구소(KIFA · www.healingcinema.co.kr)의 소개에 따르면, 영화치료는 '좁게는 영화를 감상하고 심리치료에 활용하는 것이고, 넓게는 심리치료의 수단으로 영화를 활용하는 방법을 통칭하는 치료적 기법'이다. 심리치료라는 목적 아래 전문가의 도움과 개입을 동반하는 일련의 체계와 과정이란 뜻이다.
그렇지만 이 또한 결국에는 고충 씨가 제천으로 '탈출'을 감행한 것처럼, 영화를 치유의 한 방법으로 인정하고 거기에 몸을 던지는 결단과 실천을 해야 영화치료가 주는 힐링을 체험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만의 리스트를 만들어보자
한결 좋아진 마음으로 부산에 돌아온 고충 씨는 용기를 내서 '나만의 힐링영화 리스트'를 뽑아보기로 했다. 영화를 통한 심리치료를 받으러 가든, 그렇지 않든 영화에서 받은 힐링의 생생한 체험은 누구나 정리해 보고 간직할 수 있는 것이란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나의 인생 나의 기타'(감독 에이미 레드포드·2008)는 고충 씨가 주관적으로 꼽는 힐링영화의 출발점이자 최고 온도 도달자다. 애인한테 차이고 직장에서 잘린 여자가 병원에 가서는 암 진단을 덜컥 받는다. 그녀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신용카드를 펑펑 쓰며 그간 못했던 일을 원없이 하면서 겪게 되는 놀라운 반전.
일본사회가 개인에게 워낙 압력을 많이 주기 때문인지 힐링영화로 분류할 일본영화가 많은 편이다. 고충 씨는 '카모메식당'(감독 오기가미 나오코·2007)과 '걸어도 걸어도'(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2008)를 일단 꼽아본다. "저것이야말로 내 젊은 날 꿈꾸던 사랑"임을 밀물처럼 깨우쳐준 '웰컴'(감독 필립 리오레·2009), 한국영화로는 고심 끝에 '호우시절'(감독 허진호·2009)이 떠오른다. 물론 '내 맘대로' 리스트다. 여러분도 한 번 해보시길.
■치유와 사색의 책 꼽아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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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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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무석의 '마음' |
힐링의 책을 찾아 나선 노고 씨는 오히려 노고가 적은 편이다. 문헌정보학계는 일찍부터 독서치료라는 영역을 개척해왔고, 최근에는 문학을 기반으로 한 읽기와 쓰기를 통한 치유가 관심을 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출판계는 힐링과 위안의 책 열풍이 뜨겁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위안과 힐링의 책으로 큰 관심을 끌자, 이 책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지닌 책 '아프니까 어쩌라고'(안치용·서해문집)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류동민·위즈덤하우스)가 나와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엄청나게 넓은 책의 바다에서 겪을 노고를 걱정한 노고 씨는 꾀를 냈다. 방대한 책을 보유하고, 끊임없이 신간을 구매·분류하는 부산시민도서관에 '마음에 관한 책'을 중심으로 힐링 관련 도서에 대한 자문을 구한 것이다. 시민도서관 측은 "힐링의 책은 요가, 음식, 몸부터 철학 종교에 이르기까지 워낙 다양해 독자가 나름의 기준을 갖고 접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최근 나온 책을 중심으로 철학 부문에서는 '마음'(이무석·비전과리더십·2011) '서양이 동양에게 삶을 묻다'(웨인 W. 다이어·나무생각·2011)가 꼽혔다. 철학+종교 영역에서 '아직도 가야할 길'(M. 스캇 펙·율리시즈·2011), 종교에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쌤앤파커스·2012), 기술과학에서 '나를 위한 제철밥상'(이영미·판미동·2012), 예술에서 '그림 너머 그대에게'(이주향·예담·2012)가 시민에게 추천할 만한 힐링책으로 앞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문학 부문의 '만 가지 행동'(김형경·사람풍경·2012), 역사 부문의 '소울로드'(신정일 외·청어람미디어·2012)도 힐링을 맛보게 해줄 시민의 책으로 꼽혔다. 최근 불고 있는 힐링열풍에 대해 비판적 관점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의 문예비평' 2012년 가을호(산지니출판사) 특집을 참고할 수 있다. 최근 인문학계에서는 "출판계의 힐링 열풍이 너무 커지기만 하면 위로와 위안 자체가 상품화되고 비판적인 성찰과 통찰이 위축될 우려가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