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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함석헌 선생. 우리 민족의 고통과 고난을 이야기했다. |
- 송나라의 도학자 정호·정이 형제
- 나 아닌 것과 나를 나누는 일에서
- 사회적 질병이 생김을 은유로 설명
- 겸손을 전제로 한 소통 노력으로
- 피해자가 공감하는 해법 이끌고
- 국민간 분열없는 사회 만들어야
의학서적에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질병을 인하지 않다고 한다. 인하지 않다는 말은 증상의 이름을 가장 잘 말한 것이다. 천지만물을 한 몸으로 여기며, 내가 천지만물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인이다. 만약 내게 인이 없고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손발이 마비된 바람에 기운이 벌써 통하지 않는 것처럼 내게 속하지 않는 것이 된다." ('정씨유서'에서)
■痛 : 고통
'정씨유서'는 송나라 때 도학자 정호와 정이 형제의 말을 기록한 어록이다. 형과 아우의 말이 뒤섞여 있는 탓에 누구 말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때가 있지만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람은 형 정호라고 똑똑히 적혀 있다.
공자가 새로 제시한 인(仁)이라는 개념은 참으로 쉬우면서도 어렵다. 인이 무엇인지 묻는 제자들에게 이런저런 말로 대답해준 공자 탓이 크겠다. 어떤 제자에겐 '남을 사랑하라'고 웅변하고 어떤 제자에겐 '자신에게 충실하고 남에게 믿음직하여라'고 말하며 어떤 제자에겐 '자기를 절제하고 예로 복귀하라'고 속삭인다. 공자의 말을 모아두고 생각해보면 '사회성'이란 말로 집약될 듯하다.
공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정호는 새로 인 개념을 들여다본다. 질병의 은유이다. 질병에는 고통이 따르게 마련인데 고통이 따르는 질병은 나 아닌 것과 내가 나뉘는 일에서 나온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인을 제대로 알아야만 한다. 사물과 아무 구별 없이 한몸이 되는 것이 인이다." ('정씨유서'에서)
고통이 만연한 사회는 아픈 사회임이 분명하지만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몸이 아프다고 목숨을 버릴 수 없듯, 고통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해결도 거기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의 해결은 사회적이어야만 하는데, 사회적이란 무엇보다 분할, 약탈, 지배가 없다는 말이다.
"분할은 약탈인 동시에 '지배'다. '분할하라, 그리고 지배하라'(Divide et impera)는 주문이 악마의 칼에 검명으로 새겨져 있다. 분할하고 나면 지배가 다음에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분할이 곧 지배다." (윤노빈의 '신생철학'에서)
아픈 사회를 아픈 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말이다. 다만 '병은 나아야만 한다'라고 선언하고 진통제를 놓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고통의 문제는 정의되어야 하는 것이라기보다 무조건 해결되어야 할 문제"('신생철학'에서)이기 때문이다.
■通 :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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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노빈 전 부산대 교수. 저서 '신생철학'에서 '분할은 곧 지배다'라고 주장했다. |
냄비근성이란 말이 있다. 불에 올리면 빨리 더워졌다가 내리면 곧 식어버리는 양은 냄비의 특성에서 나오고 우리 국민성을 비아냥거리는 식민지의 주문이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근대화'의 화신들은 우리가 정반대라고 선언한 적이 있다. 우리는 '은근과 끈기의 민족'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말과 상관없이 냄비근성처럼 보이는 무엇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확실하다. 원인은?
"고통은 인간을 순간의 포로로 만든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고통 이외의 것에 대하여 무감각하다. 고통을 거듭 당하는 사람은 점점 고통의 원인에 대하여서도 무감각하게 된다." ('신생철학'에서)
고통에 따른 무감각, 곧 감각의 상실이 냄비근성의 기원이고 실체이다. 거듭된 고통을 역사적으로 승화시킨 이가 함석헌 선생이다. 그분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한 마디로 '고난의 역사'라고 규정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그래서 사회적일 뿐 아니라 역사적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짐만을 짊어져야 할 성스러운 짐꾼이다. 그러나 자기 짐을 피해자에게 넘겨주고 짐꾼이라는 이름조차 벗어서 피해자의 정신 속에다 짊어지우는 가해자 악마들은 얼마나 마음 가벼우며 발걸음 가벼울 것인가?" ('신생철학'에서)
짐 떠넘기기, 의무의 방기, 외면, 몰염치가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횡행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겸손 같은 것이 있겠다. 겸손을 뜻하는 '주역'의 15번째 '겸괘'에 대해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수고스럽지만 뽐내지 않고 공이 있지만 덕을 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가장 지극한 후덕함이다. 자기 공을 남보다 아래에 두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덕은 성대해야 하고 예는 공손해야 한다. 겸손하다는 것은 공손함을 이룩해서 자기 자리를 보존하는 것이다." ('주역'의 '계사전'에서)
고통의 해결 방법은 감각의 회복이고 감각이 회복하려면 혼자선 안 된다. 공감해야만 한다. 고통은 고통을 당하는 쪽만 문제가 아니라 고통을 주는 쪽의 문제이기도 한 탓이다. 그래서 주체에만 몰두해서 해답이 나올 수는 없다. 공감은 서로 통해서 주고받기, 곧 소통에서 나오고 소통의 전제를 '주역'은 겸손, 선불교는 하심이라고 한다.
■統 : 통합
통합이란 말이 횡행하고 있다. 연초 야권에서 연합이니 통합이란 말이 떠돌다가 야당마다 통합이란 말을 당명에 붙이는 것으로 낙착된 적이 있는데, 그들에게 통합은 당파의 연합전선 구호 이상이 아니다. 이후 벌어진 야당의 정치 과정을 보면 새로 붙인 통합이란 말도 본래 당명처럼 '그들만의' 이상이자 허구인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말이다.
경제민주화 이슈와 마찬가지로 통합이란 이름을 다시 여당에서 가로채는 일이 벌어졌다. '국민대통합'이란 구호로 말이다. 다만 이때 통합은 실체가 모호한 가족주의의 인륜 질서에 호소하는 감성 언어라는 점이 다르다.
분열의 반대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통합이란 말에 별다른 반감을 보이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통합이란 말이 본래 가진 '시스템'이라는 전제이다. 남의 시스템에 속하지 않거나 언뜻 발만 걸쳐 놓은 자들은 참여의 자격조차 없는 형편에 통합을 말하는 사람은 모호함을 벗어야 한다. 과연 누가 실체이냐고.
'사람이 먼저'라는 구호를 내세운 문재인 경선 후보는 '대못을 치겠다던' 참여정부의 시스템 맹신이 어떤 이유로 이렇게 바뀌었는지 특히 해명해야만 할 것이다. 그때는 왜 그랬고 이제 와서 왜 이러는지.
# 이정과 '이정전서'
이정(二程)은 정호, 정이 형제를 함께 부르는 말이다. 영어권에서는 '정 브라더스'라고 옮기는데 이쪽이 더 느낌이 있다. 송나라 때 사람인 형제는 문학가 그룹과 가까이 지냈지만 사상가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란 공통점이 있다.
비록 문학보다 사상에 몰두한 점은 같아도 형제의 개성은 몹시 달랐다고 한다. 정호는 온화하고 활달한 사람이라 제자들은 그를 '봄바람 같다'고 했고, 정이는 엄숙하고 곧은 사람이라 '나무인형이 앉아있듯 단정하다'고 평했다.
다른 개성에서 나온 형제의 생각은 이후 형성된 유학에 깊게 각인되었다. 형인 정호는 마음공부 쪽에 몰두한 것 같고 아우인 정이는 이치공부 쪽이었다. 그래서 모종삼 같은 현대 중국 철학자는 마음공부에 치중하는 심학의 기원을 정호에서 잡고 이치 공부인 이학의 기원을 정이에게서 찾는다.
'이정전서(사진)'는 정호, 정이 형제의 글과 말을 모은 책이다. 정이의 증손제자뻘인 주희가 모으고 편집했는데 주자학을 숭상한 조선 왕조에서도 간행한 적이 있다. 다만 형제의 학문은 다른데 정호가 아닌 정이의 방식으로 이해하려 한 점이 문젯거리이다. -끝-
임형석 고전인문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