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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수 사물놀이패 공연 모습. 국제신문DB |
올림픽. 월드컵과 함께 4년마다 돌아오는 세계인의 종교. 폭염의 열대야를 견디게 하는 각본 없는 드라마의 축제.
중계방송의 한켠에 언뜻언뜻 응원의 꽹과리 소리가 들린다. 월드컵 때만큼 지속적이고 강렬하지 않아도 2002년 월드컵 이후 "대~한민국!"을 외치는 응원 구호와 함께 사물놀이의 타악기 소리는 한국 스포츠 응원의 상징이 되었다.
사물놀이가 '붉은 악마'와 만나는 데 우리의 전통음악을 사랑한 한 공무원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알고 보면 너무 간단한 것인데도 우리는 2002년 월드컵이 열릴 때까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김덕수와 그의 동료가 70년대 후반에 창안한 사물놀이는 케케묵은 옛날의 음악이 아니라 농악이라는 전통의 바탕에서 탄생한 한국의 현대음악이다. 갈래갈래 찢긴 우리의 음악 문화에서 김덕수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절대 간단하지 않다. 그는 한마디로, 일본 제국주의 문화 해방 이후 밀어닥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문화의 일방통행 속에서 의문으로 가득 찬 현대적인 한국 음악 문화의 정체성을 전통의 재해석과 다양한 실험을 통해 규명해 나가는 현재진행형의 예술가이다.
우리 음악의 불행은 근대라는 이십 세기의 지평선에서 홍난파와 현제명 같은 유학파를 중심으로 한 서양음악 진영이 전통음악의 미학 체계를 '원시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몰아 전면적인 부정과 격하를 단행하는 한편, 일본 음반산업 자본에 기초하여 새롭게 부상하던 대중음악권 역시 '저질과 퇴폐'의 낙인을 찍으며 역사의 통시성과 각 장르 간 공시성의 급격한 단절을 불러온 것이다. 서로서로 의심의 눈초리로 소 닭 보듯 쳐다보는 동안 강대국에 의한 한국 음악 문화의 '분할 통치'(divide&rule)는 역설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이다.
분단 이후 근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이 세 진영의 균열을 봉합하려는, 작지만 주목할 만한 극복의 노력이 있어 왔다. 멀리 독일에서는 윤이상이, 그리고 국내에서는 황병기가 그렇다. 대중음악의 영역에서도 멀리는 신중현과 김수철에서 가까이는 90년대 최대의 문제아 서태지와 신해철 같은 이들이 비록 단속적이긴 했지만 우리의 호흡을 복원하고 더욱 창조적인 질서를 만들어 내려는 몸부림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1978년 농악의 네 개 타악기를 무대 음악화한 사물놀이의 등장만큼 일파만파의 충격을 제공한 것은 없다. 그것은 마음속에 우리 전통음악의 숨결을 망각한 한국의 음악 수용자들에게 유구한 리듬 감각을 일깨워 놓음과 동시에 그 어떤 진영의 음악도 수행해 내지 못했던 말뿐인 우리 음악의 세계 진출과 세계 음악과의 수평적인 교류를 획기적으로 열어 놓았다.
그러나 정작 이 땅의 우리는 그저 신기한 눈으로 힐끗 바라보았을 따름이다. 사물놀이가 유엔의 총회장에서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펼쳐도 정작 국내에서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가장 먼 이상한 땅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음악이 장삼이사의 시민들로 구성된, 그것도 주로 젊은 세대들로 이루어진 경기장의 응원석에서 다시 되살아났다는 사실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대한민국 파이팅, 사물놀이 파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