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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와 노자의 만남'(무씨사 한나라 화상석 탁본).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사마천의 시대에 공자가 노자를 방문한 일은 상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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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의 공자, 노자 만났지만
- '禮의 자연 기원' 믿지 않다가
- 노년이 되어서야 이해한 듯
- 아낌없이 베푸는 자연의 禮
- 유한성 있는 인간엔 불가능
- 호혜와 교환의 질서로 대체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를 묻자,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칭찬하는 사람들의 육신은 이미 썩었고 오직 그들의 말만 남아 있을 뿐이오. 뛰어난 장사치는 재물을 깊이 감춘 뒤 빈 것처럼 꾸미고 훌륭한 덕을 지닌 군자는 어리석은 듯 겉모습을 꾸민다고 나는 들었소. 이제 그대는 교만과 탐욕, 허세와 투지를 버리시오. 그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오."('사기'의 '노장신한열전'에서)
■노자와 공자의 차이
그에 관한 모든 것은 추정이다. 최초로 그의 전기를 쓴 사마천도 그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말하지 못했다. 중년의 공자는 그를 만나러 일부러 멀리까지 갔고 오히려 자신의 전공일 법한 '예'에 관해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아마 '꾸미기'라는 나쁜 본질이 예에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하는 듯하다.
'노자는 용과 같아 자기가 도저히 알아챌 수 없는 사람'이라고 공자가 시인하면서 이야기는 끝나지만, 다른 데서 공자의 반박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고대의 위대한 임금들이 예를 세울 때 뿌리와 꾸밈이 있었다. 충실과 믿음은 예의 뿌리이고 정의와 이치는 예의 꾸밈이다. 뿌리가 없으면 예가 서지 않고 꾸밈이 없으면 예가 시행되지 않는다."('예기'의 '예기'에서)
공자에서 순자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탄생한 '예기'에 있는 말이다. 노자에 대한 공자의 대답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여기서 공자는 사회 구성의 원리인 예가 가진 꾸미기의 본질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충분조건으로 긍정하는 입장이다. 마치 공자를 재반박하는 듯한 노자의 말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도를 잃은 뒤에 덕이 생기고 덕을 잃은 뒤에 인이 생기며 인을 잃은 뒤에 의가 생기고 의를 잃은 뒤에 예가 생긴다. 예는 충실과 믿음이 엷은 것이고 혼란의 시작이다."('노자' 제38장에서)
중국 전통 사회에서 '이상적 규칙과 질서의 체계'라고 보았던 예가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의 끝장 또는 타락이라고 노자는 보고 있다. 두 사람이 예를 두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쩌면 예의 기원과 범위에 대한 두 사람의 전망이 다른 탓은 아닐까.
■공자의 비밀스런 가르침
공자는 본래 예의 기원과 범위를 사회에 한정하고 있었는 것 같다. 도덕과 인의를 말할 때도 그는 그렇게 생각한다. 반대로 노자는 사회를 넘어선 예의 '자연적 기원'을 조망하고 있는 것 같다. 공자가 사회를 인간의 자발성 내지 자의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면 노자는 사회도 자연계의 규칙과 체계에 따른다고 본다는 말이다.
인간의 자발성에 뿌리를 둔 공자가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공자가 반복해서 말하는 이상적 인격체, 군자가 그것을 대표한다. 이상적 인격체를 특정하지 않고 수많은 비유를 동원하는 노자와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런데 사회 질서의 자체적 기원을 믿은 중년의 공자와 달리, 노년의 공자는 좀 달라진 듯하다.
중년의 공자 생각을 대변하는 '논어'에서 노년의 공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주역'에 대한 공자의 소회를 적은 '계사전'에서 우리는 아마 노년의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노력하는 인간인 군자보다 어쩌면 종교적이랄 수 있는 '대인'을 공자는 그때 천착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역은 지극한 것이구나! 성인이 덕을 우러르고 사업을 넓히는 근거가 역이다. 지혜로우면 우러르고 예가 있으면 자기를 낮춘다. 우러르면 하늘을 본받고 낮추면 땅을 본받는다."('주역'의 '계사전'에서)
공자도 고백했듯, 점치는 책으로 하찮게 치부되던 '주역'을 노년의 공자가 그렇게 애지중지한 까닭은 무엇일까. 노자를 만난 탓인가. 그보다도 아마 그는 젊어서부터 궁금해 못 견디던 비밀, 예의 기원과 범위에 대한 해답을 여기서 어느 정도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를 넘어선 예의 기원이 바로 영원히 풍요로운 생산성을 가진 자연이라는 것을 그의 '주역'은 분명히 확증한다.
"성대한 덕과 위대한 사업은 지극하구나! 풍부하게 가지는 것이 위대한 사업이고 나날이 새로워지는 것이 성대한 덕이다."('주역'의 '계사전'에서)
■전체적 급부
예의 기원이 자연에 있다는 점을 인정한 공자는 예의 본질과 정신을 구체적인 데서 찾는다.
"최초의 예는 음식에서 시작되었다."('예기'의 '예운'에서)
의식주가 살림살이의 기본이라고 하지만 셋 가운데 더 중요한 것은 없을까? '먹고 살기 어렵다'는 말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먹는 일인 것을 알 수 있다. '콩 반쪽도 나눈다'는 말에서 먹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베풀기와 나눔, 증여와 호혜가 먹는 일의 본질이란 말이다.
'대가 없이' 베풀거나 '아낌없이' 주는 일은 이상화된 자연만 가능하다. 에덴동산도, 만나도 결국 끝이 났다. 자연과 달리 유한성을 자각한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나눔과 호혜의 질서 또는 더 나아가 교환의 질서가 나온다. 중국의 예도 이것을 벗어나지 않는다. 나눔과 호혜의 질서라는 뜻에서 예는 '증여를 닮은 지연된 교환'에 다름 아니다. '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때맞추기'('예기'의 '예기'에서)라는 말의 참뜻이다.
일찍이 유럽적 사회가 아닌 사회에 사는 사람들을 관찰한 사람들이 있었다. 민족지학자들은 북서 아메리카 해안 지역,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 뉴질랜드 등지에서 포틀래치, 쿨라, 하우 등을 발견한다. 이런 사실들을 엮어 연구한 마르셀 모스는 이 사회들이 '전체적 급부', 곧 증여의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 체계라는 것을 밝혔다. 나아가 그는 유럽 세계가 이미 잊어버렸거나 남아 있더라도 변형된 증여를 되살릴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어느 새 베풀기나 증여는 주관적, 인격적, 개인적 문제가 되고 말았지만, 우리 시대가 그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낙서에도 남아 있다는 말, '요즘 젊은 것들은 예의가 없다'처럼 시시콜콜한 예의범절 따위를 예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생각은 너무 오래되었다. 오늘도 입에서 절로 이 말이 흘러나오는 사람들은 자신이 과연 진짜 예를 아는지, 그래서 정말 예의 바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예의 기원, 본질, 정신이 증여인 한, 나는 오늘 얼마나 베풀었는지를.
# 마르셀 모스와 '증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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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셀 모스. |
마르셀 모스는 프랑스의 인류학자이자 사회학자이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켕의 조카이자 조수인 탓에 그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 유태인 혈통의 그는 생시몽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신봉한 사람이기도 하다. 드레퓌스 사건에 깊이 간여한 것도 이런 탓일 테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래드클리프 브라운, 에번스 프리처드, 멜빌 허스커비츠 등 뛰어난 인류학자와 사회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친 그이지만, 현지 조사에 참여하지 않은 채 민족학 이론과 방법을 서재에서 구상한 사람이라는 점도 놀랍다.
'증여론'은 유럽 이외의 사회의 '선물 교환'을 연구해서 그들 사회의 구조와 체계를 밝힌 그의 대표작이자 문제작이다. 여기서 그는 증여를 '전체적 급부'라고 개념화했다. 증여는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인 것이고 물질적 이익, 권력, 상징적이며 신화적인 의미, 아름다움이 동시에 관련되는 사회적 교환이라는 뜻이다.
모스는 증여가 자발적 행위이면서도 사회적 의무라는 점을 명시했고, 특히 '의무'라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증여가 의무인 이유는 증여 유무를 통해 사회관계의 중요 원리인 호혜성과 적대감을 보여줘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여를 의무로 본 모스의 의견에 반대하는 학자도 없지 않다.
모스는 유럽 이외의 사회가 지닌 원리를 탐구했지만 증여 원리가 유럽 사회에도 마찬가지로 있었고 현대 사회에도 변형되어 존속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모스와 '증여론'이 밝힌 증여 개념을 다시 찾게 만드는 까닭이다.
임형석 고전인문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