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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사진엽서에 등장한 인천 주안염전. 일제는 1907년 인천 주안리에 대만식 천일염 시험장을 조성했다. |
- 소금장수 설화·'자염' 비법 등
- 소금생활사 맛깔스럽게 전해
-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유승훈 지음/푸른역사/2만 원
낙동강 상류의 얼음이 녹기엔 아직 이른 음력 정월 하순, 커다란 돛배에 소금 수천 가마니를 실은 선상(船商)들이 서둘러 낙동강 하구의 하단 포구를 뒤로 하고 강을 거슬러 오른다. 장 담는 철(음력 2, 3월)에 늦지 않게 내륙 지방에 소금을 팔러가기 위해서다. 한 달여 고생 끝에 경북 상주 낙동진에 도착, 가져온 소금을 다 판 뒤 쌀 보리 콩 등 내륙의 곡물을 사서 낙동강 하구로 다시 내려와 판다. 선상들은 이 같은 낙동강 소금장사로 배가 넘는 이윤을 남긴다. 낙동강 소금장사를 그래서 '배(倍)장사'라고 한다.
소금장사를 하는 선상들의 근거지는 낙동강 하구의 하중도(河中島)인 '명지도'. 지금은 이 일대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지만, 구한말만 해도 30여 개, 24만여 평의 염전에서 연간 3만7000여 석의 소금이 생산되었던 경상도 최고의 제염 지역으로 명성이 높았다. 다산 정약용이 명지도에서 생산되는 소금 이득이 나라 안에서 제일이라고 꼽았을 정도였다.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에 나오는, 조선 후기의 부산 강서구 명지동 일대 풍경이다. 낙동강 소금장사는 1950년대까지도 볼 수 있었으나, 1959년 9월 태풍 사라가 불어닥쳐 명지도 염전을 싹 쓸고 간 뒤 종적을 감췄다. 이젠 명지동 평성마을의 '문초시 염전', 하신마을의 '홍처사 염전'과 '박진사 염전' 등 전해지는 지명에서나 지난 날의 영화를 어림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은 이처럼 소금에 얽힌 우리의 옛 생활상을 살뜰하게 되살려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고려 말부터 6·25전쟁 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소금 생산·유통 제도의 변천 과정에 대한 꼼꼼한 조명과 함께 소금장수에 관한 설화, 우리의 전통 제염인 자염(煮鹽 : 바닷물을 끓여 만든 소금) 생산비법 등 온갖 소금 생활사를 맛깔스럽게 버무려놓았다. 그런 점에서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인 저자의 이 책은 '소금 문화사'라 할 수 있다.
소금의 제도사적 고찰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정약용의 염세 개혁방안이다. 다산은 오늘날로 치면 소상공인에 해당할 염호(소금 생산자)에 대한 '소금세를 줄여 소금세를 늘리는' 정책 도입을 주창했다. 그는 인조 때의 문신 정언황의 예를 들며 자신의 주장을 폈다. "감사 정언황이 인천부사가 되었는데, 인천부의 염세가 본래 과중하였다. 그는 염호가 날로 쇠퇴함을 알고 도리어 그 염세의 3분의 2를 감해주고 또 관리들을 단속하여 그 어물(漁物) 침탈을 근절시켰더니 다른 지방의 염호들도 소문을 듣고 다투어 모여들었다. 염호가 많아지자 염세 수입도 갑절이 되었다."
소금의 주술적 힘에 관한 대목도 흥미롭다. 소금을 이용해 액을 물리치려는 행위는 우리나라만이 아닌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도 널리 행해졌다고 한다. 신생아가 태어나면 소금으로 문질렀고(구약성서 에스겔), 유럽에서는 기독교 전래 이전에 아이에게 소금을 뿌리거나 아이의 요람에 소금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런 소금이 만병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그 때문에 소금이 주었던 그 짭짤한 역사문화의 진미까지 잊어버렸다." 저자는 "인간이 짠맛을 추구하는 이유는 내부의 세포가 품고 있는 바다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라며 "우리는 매일 소금을 먹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인 바다를 먹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