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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 드 샹파뉴 1671년 작 '바니타스'(프랑스 테세 박물관 소장). 꽃은 삶, 해골은 죽음, 모래시계는 시간을 상징한다. |
- 4·11 총선 야당 패배, 리더십 못 보여준 탓
- 백성 개개인들은 어리석을 수 있지만 여론은 현명한 법
- 변화무쌍한 민심…강원·충청도를 보라
- 자유선진당 참패가 TK 미래일 수 있어
- '이것이 최선' 선입견, 맹목적 선택 불러와
- 정치 변화 원한다면 매너리즘 극복해야
제19대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이 끝났다. 선거에 승리한 여당은 여유롭게 승리를 즐기는 분위기고, 패배한 야당은 내분에 휩싸인 형국이다. 어디까지 가게 될지는 두고 봐야겠다.
총선이 연말 대선까지 이어진다는 점 때문에 언론은 선거 이후의 분석과 대담을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각 정당이 잘한 점과 잘못한 점에만 초점을 맞추는 인상이다. 이미 비난받았던 각 정당의 공천 과정과 그림이 겹친다.
이번 선거 결과를 결정한 것은 우리 국민이다. 국민이 관객이 아닌 바에야 국민의 선택에 초점을 맞춰 생각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지금은 정당의 득실을 따지는 판이다. 우리 국민의 의사가 우선하고 존중받아야 마땅한 데도 말이다.
■국민은 어리석기도, 현명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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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넬리우스 데 헤엠 1661년 작 '악기의 바니타스 정물'(암스테르담 리휙스 박물관 소장). 바니타스는 덧없다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이다. 여기서 악기나 과일 따위는 삶, 숨어서 잘 보이지 않는 해골은 죽음을 상징한다. |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천하를 차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한나라 문제(文帝) 때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가의(賈誼)라는 사람이 살았다. 진나라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 천하를 잃었는지, 이유를 분석한 그의 글 '과진론'은 당시 한나라 정계에 엄청난 호응을 불러왔다. 문장도 좋아서 대대로 유명했다.
천하 정세의 변화를 심사숙고한 가의는 제한적이긴 하지만 백성의 정치 참여에 호의적인 생각이 있었다. 왕정이나 귀족정 아래서 이런 생각은 당연히 개혁적이다. 하지만 그는 백성을 온전히 믿지는 않았다.
"백성 민(民) 자는 눈이 어둡다는 뜻이다. 백성 맹(氓) 자는 눈이 멀었다는 뜻이다. 현명함과 어리석음의 재질을 가진 것이 백성이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모두 있다. 백성은 비록 어리석지만 현명한 군주는 관리를 선발할 때 꼭 백성을 참여시킨다. 백성이 후보를 칭찬하면 현명한 군주는 잘 살피는데 백성이 그에게 의지하는지 보고 등용한다. 백성이 후보를 괴롭게 여기면 현명한 군주는 잘 살피는데 백성이 그를 비난하는지 보고 파면시킨다. 백성은 지극히 신분이 낮지만, 백성이 관리를 고르게 할 때는 꼭 그들이 아끼는 사람을 취한다."('신서'의 '대정'에서)
글자 뜻풀이에서 글의 실마리를 푸는 방식은 한나라 때 유행한 훈고학의 전형이다. 백성 민 자는 찔려서 멀어버린 눈을 본뜨고 백성 맹 자는 눈이 없다, 곧 없을 망(亡) 자를 넣어 눈이 멀었다는 뜻을 강조한 글자이다. 백성은 어리석어서 의논 상대가 안 된다는 일반적인 생각이 글자에 담겨 있다.
가의는 상식을 뛰어넘어 여론이나 중론은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리석을 수 있어도 여론은 현명하다는 믿음이다. 총선에서 야당이 패배한 원인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같은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선거 막바지 야당의 위기 대처 능력이 의심받으면서 국민들은 심증을 더 굳혔을 것이다. 눈이 먼 백성은 코를 단련시키는 법이다.
■민심은 천심
가의는 정치의 핵심이 백성에게 있고 백성이 그런 이유를 네 가지 든다.
"백성이 근본이 아닌 적은 없다. 백성이 천명이 아닌 적은 없다. 백성이 업적이 아닌 적은 없다. 백성이 힘이 아닌 적은 없다."('신서'의 '대정'에서)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백성이 천명이자 힘이라는 점이다.
'백성이 천명'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흔히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처럼, 백성의 여론은 신의 말씀과 같다는 것이다.
"나라는 백성을 천명으로 삼고 군주는 백성을 천명으로 삼으며 관리는 백성을 천명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백성에 의해 나라의 존망이 결정되고 백성에 의해 군주의 어리석음과 현명함이 결정되며 백성에 의해 관리의 능력이 있고 없고가 결정된다."('신서'의 '대정'에서)
명령을 받았으면 군주와 관리가 운영하는 나라는 나랏일을 해야 한다. 이때도 백성의 의지에 기댈 수밖에 없다.
"전쟁에서 이기는 이유는 백성이 이기고자 했기 때문이다. 공격이 성공하는 이유는 백성이 성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외적을 막아 보존하는 이유는 백성이 보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성을 거느리고 외적을 막으려고 해도 백성이 보존하고자 하지 않으면 보존할 수 없다. 백성을 거느리고 공격하려고 해도 백성이 성공하고자 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백성을 거느리고 전쟁을 하려고 해도 백성이 이기고자 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신서'의 '대정'에서)
그래서 백성을 '힘'이라고 하는 것이다. 백성의 힘을 업어야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고 국가의 흥망성쇠, 권력의 강약, 관리의 능력이 결정되고 업적도 이룰 수 있다.
이번 선거에서 야당의 실패가 여당의 성공 때문은 아니다. 사실상 각 정당은 모두 실패했다고 할 수도 있다. 이번에 의지를 표출한 민심도 다시 움직일 것이다.
■민심을 두려워하라
민심은 본디 잘 변한다. 이번 선거에선 강원도가 그랬고 충청도가 그랬다. 충청도를 기반으로 한 지역주의 정당인 자유선진당이 이제 제3당의 지위를 잃은 일은 눈여겨봐야 한다. 자유선진당의 오늘이 어쩌면 대구, 경북 지역이나 부산, 울산, 경남 지역의 미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려워할 것은 민심에 있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정관정요'의 '군도'에서)
이번 총선은 우리 지역의 민심이 이전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3당 합당 이래 대구, 경북과 현저히 동조화되었던 정치 성향은 변했다. 2010년 지방선거는 변화의 시작을 확인했고 이번 총선은 재확인했다.
문제는 매너리즘이다. 무기력하기는 오십보백보인 지역의 각 정당과 지역민들. 항상 틀에 박힌 일정한 방식이나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신선미와 독창성을 잃는 일이 반복되어선 안 되겠다. 일정한 양식을 고수하는 태도인 매너리즘은 본디 고도의 지성을 전제로 해서 생기는 태도이다. 이것이 최선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는 맹목적이고 비지성적인 태도가 없었는지 되물어야 한다.
# 매너리즘
- 거장이 거장일 수 없게되면 매너리즘의 입지 좁아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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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르미지아니노 1534~1540년 작 '목이 긴 성모'(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그는 매너리즘을 대표하는 화가로 꼽힌다. |
매너리즘은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타성에 젖어 있을 때, 또 그런 태도를 비난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매너리즘은 본디 르네상스의 전성기인 16세기 유럽의 회화, 조각, 건축 따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퇴보에 도달한 전통주의'나 '정신적 위기의 시대에 두각을 나타낸, 죽어가는 양식의 마지막 표현'이라는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 않다.
매너리즘이란 말 자체는 예술가의 특징적인 '터치'나 '양식'을 가리키는 이탈리아 말 마니에라(maniera)에서 나왔다. 양식주의라고 옮길 수도 있는 매너리즘은 고도로 숙련된 대가의 손길에서 나오는 이상적인 아름다움, 기품, 세련됨, 능숙함을 가리키는 긍정적 의미도 있다. 매너리즘의 시대는 급격한 변화가 잉태되는 때이다. 환쟁이의 마지막, 예술가의 첫 시대가 바로 매너리즘의 시대이다. 인간은 본디 타성에 젖기 쉽다. 익숙하면 편안하게 느껴지고 새로우면 불편하게 느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늘 현재의 삶에 불만을 품지만 새로운 삶은 낯설고 두렵다.
당신은 거장의 손길에서 나오는 정치를 여전히 바라는가. '정치 9단'이라 불리던 거장의 손길이 그리운가. 세월은 흐르고 그들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다. 거장이 거장일 수 없게 된 때 매너리즘의 입지는 무척 좁다. 거장을 바라는 선거도 아마 이제 막바지일 것이다.
임형석 고전인문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