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세종의 인간 수레-세종실록의 기록을 토대로 시작하는 연극소설 '궁리'는 세종이 타고 가던 안여의 수레바퀴가 빠져 달아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소설에서는 단 한줄로 표현되는 이 장면이 연극 무대에서 엄청난 파괴력과 역동성을 보여주는 스펙터클로 연출된다. 임금의 수레를 기층 민중들이 몸으로 엮어 만든 인간수레로 형상화 했다.

- 주군은 왜 내게 수레를 만들라고 하셨습니까?
- (1442 임술/세종 24년, 3월 16일)


나이 예순에 세종이 탈 수레를 만들라는 명을 받고 조정에 불려나온 조선 최고의 공작인 장영실.
"내가 점점 하찮은 인간으로 늙어 가는구나"… 그는 수레를 만들면서 무기력해지고 일에 대한 의욕도 잃어간다.
운명의 날. 임금이 타고 가던 수레 쇠바퀴가 빠지면서 결국 죄인의 몸으로 의금부에 갇히는데….

	수레바퀴가 빠져 달아나는 장면은 무대가 공연 도중 경사 60도로 무너지면서 배우들이 실제로 미끄러져 바닥에 처박혀 뒹구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임금이 타고 가던 안여(安輿)가 강원도 이천으로 향하던 중 쇠바퀴가 달아나고 그대로 주저 앉았소." 그리고는, 의금부 당직 사령은 우리에게 속옷 외 입고 있는 관복, 관대, 옷에 부착된 노리개, 상투까지 모두 풀라고 명령했다. 영문도 모른 채 붙들려 온 선공감 정의 조순생 선공직장 임효돈 녹사 최효남 모두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나는 잠시 난처해진다. 이게 무슨 변이지….

그러나 의금부 군사들에게 거칠게 관복을 벗기우고 상투가 잘려 나가면서 오히려 착잡해지는 나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왜 이리 마음이 고요해질까. 내가 생각해도 나 자신의 속내를 읽어낼 수 없다. 나는 어쩌면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라도 있었단 말인가. 아, 이게 내게 주어진 팔자로구나 생각하니 현실적인 고민거리들이 다 사라지고 단 하나의 질문만 남는다.

주군은 왜 내게 수레를 만들라고 하셨습니까?



두 달 꼬박… 주군이 타고 갈 수레를 만들면서 짜증이 났다. 짜증이 나면서도 정작 그런 의문을 갖지 못했다. 내가 임금이 타고 갈 수레나 만들면서 점점 하찮은 인간으로 늙어 가는구나, 느끼면서 짜증이 났을 뿐이다. 그러나 주군에 대해 한 점 원망도 없었다. 다시 궁에 불러준 주군의 배려에 대해 감사하고 싶었다. 그러나 일이 예전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매사 귀찮아지고 심드렁해졌다. 내가 늙어 버렸는가? 아니면 일에 대한 의욕을 잃어 버렸는가? 그런 생각이 들면서 차라리 광산에 있을 걸 괜히 서울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도면을 그려 바친 측우기가 올해 내로 세상에 첫 선을 보인다는데, 내가 거기 없으면 어쩌나 그런 생각으로 서울 생활을 버텼다.

"왜 나를 서운관에서 일하게 하지 않고 여기 선공감에 발령을 내었답니까?"

선공감에 배치된 지 달포가 지나서야 호조에서 사람이 왔다. 측우기 원통 지름을 8치로 할 것이냐 7치로 할 것이냐 왈가왈부한데 어떻게 생각 하느냐 물으러 왔다길래 작을수록 좋다고 답해 주었다. 군말 없이 돌아서는 서운관 관리에게 나는 그렇게 물은 것이다.

"서운관은 들락거리는 외인들이 많아서 자네가 있을 곳이 못 되네. 명나라 사신 오양이 자네를 잡아 명으로 압송하라는 밀명을 받고 왔다는 설이 난무한데, 그 작자가 아직 돌아갈 생각을 않고 있네."

"나는 명에 죄지은 것이 없소."

"자네가 만든 모든 천문 관측기구는 다 명에서 훔쳐온 것이라네."

"말도 안 되는 소리, 명에 측우기는 없소."

"그러니까 여기 조용히 있으라고. 내가 왔다 갔다 할테니까…."

그 이후로 호조나 서운관에서 나를 찾아 오는 사람은 없었다. 측우기는 제대로 준비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측우기에 관한 한 나 없이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아직 다 하지 못한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거지…."

선공직장 임효돈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그러나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닥친 것이다. 우리가 만든 수레가 부서진 것이다. 그 속에 임금이 타고 있었다. 임효돈도 자신이 내뱉은 말이 공허한 듯 쓰게 웃었다.

"그래 일찌감치 고향에 내려갔어야 해…." 그리고는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고향이 어디요?"

이때 녹사 최효남이 엉뚱하게 큰 소리로 물어서 모두 돌아보게 되었다. 그는 애써 흰 이빨을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그러나 왼손 손목을 심하게 떨었고 이마에서 땀방울이 쉬임없이 흘러 내렸다. 그는 지금 두려운 것이다. 악착스럽게 살고 싶은 인간이 겁이 더 많은 법이다.

4월인데도 의금부 취조실은 더웠다. 심하게 땀을 흘리며 떠는 최효남에게 무어라 대답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임효돈이 큼지막한 소리로 지껄이기 시작한다.

"내가 이래뵈도 풍천 임씨 11대손이야."

"대단한 집안이네."

"고향 전답 다 내버려 두고 내가 왜 답답한 궁에 들어와 있는지 모르겄네."

"그러게 말이요, 이제 그 집안 박살나게 생겼네."

"…."

"어허, 거 쓸데없는 소리."

대호군 조순생이 최효남의 방정맞은 입을 막았고,

"내 말이 틀렸소? 우리는 이제 다 죽은 목숨이오."

그러면서 최효남은 까마귀처럼 울기 시작했다. 최효남의 울음소리는 똥구녕에서 쏟아 오르는지 깊고 씁쓸한 냄새가 났다. 그래서 누구도 동정심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꺼이꺼이 울었고 나머지는 고요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오?"

조순생이 의금부도사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뭘 말이요."

"누가 우리를 국문할 것 아니오?"

"글쎄, 나는 그냥 당직사령이오 그런 일은 윗분들이나 알지."

"…그럼 바둑판이나 가져다 주시오."

"…뭐요?"

"하염없이 기다리는 거 이거 힘든 일이오. 차라리 바둑이나 두면서 기다리면 안 되겠소?"

조순생 대호군은 역시 당대 최고의 바둑 고수답게 여유가 있었다. 사실 그는 선공감 정의로 실무 책임자이면서도 주군의 안여 만드는 일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거의 매일 바둑판을 들여다보며 살았다. 행정책임자가 이러하니 선공감 분위기가 썰렁하니 영 말이 아니었다.

선공직장 임효돈은 고향에 사둔 땅에 새 집을 짓고 있었다. 그는 사촌이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스스로 관직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린 듯 했다. 고려조부터 대대로 이어오는 문신의 가문이란 자부심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측량하려 했다. 그러나 당상관에 오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일에 대한 의욕도 잃어 버렸다. 내가 다시 궁 내직으로 들어와 선공감에 배치되었을 때 나를 가장 난처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조순생과 같은 종삼품 대호군 벼슬을 지닌 나를 상관으로 예우하지 않았다. 주군은 내게 그 어떤 직책도 내리지 않으셨다. 그냥 선공감에서 안여를 만들라는 지시 뿐이었다. 그래서 내 위치가 어정쩡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안여 제작도 임효돈의 지휘 아래 진행되었고, 나는 그저 기술 자문 역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약간의 기술 자문이라도 해 보려고 말을 걸면 임효돈은 내심 불쾌한 기색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임효돈을 대하기가 더 조심스러웠다. 그는 묵묵히 일만 했다.



사실 수레바퀴가 달린 가마를 제작하는 일은 오래된 기술이다. 춘추전국시대에도 바퀴가 서른 여섯 개나 되는 걸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노자 도덕경을 보면 수레바퀴 숫자까지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철공들이 쇠를 녹여서 둥근 쇳덩어리를 만드는 일인데 조선의 제련술이 떨어진 것도 아니라서 굳이 내가 관여할 일이 없었다. 그건 하찮은 일이었다. 그런데 임금은 이미 나이 예순에 접어든 금속 천문기구 제작 기술자에게 왜 그런 하찮은 일을 맡기시는지 모를 일이었다.

녹사 최효진은 차라리 대하기가 편했다. 그는 출근하자마자 관복으로 갈아 입고는 밖으로 나돌았다. 궁 안과 바깥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면서 세상의 냄새를 맡으려 했다. 그는 입이 가벼웠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일을 남에게 말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성격이었다. 그는 항상 유쾌하게 떠들었고 붙임성도 좋았다. 그나마 나를 인정해 주는 유일한 동료였다. 그는 내가 왜 선공감에 와 있는지 모를 일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최효남을 통해 내가 도면을 바친 측우기가 올해 오월 단오절을 기하여 종루 네거리에 세워진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런데 왜 여기 있느냐고? 나도 모를 일이다. 주군만이 알고 있다.



조순생 역시 대하기가 편한 위인이다. 그는 항상 온화하고 여유가 있는 모습이다. 할아비가 조선 개국공신인데도 오만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직까지 개국공신은 태조 이후 3대에 이르렀는데도 그 위력은 빛난다. 그러나 개국공신의 자손이란 딱지가 조순생에게는 오히려 부담이 되고 있다. 바둑 밖에 둘 줄 모르는 데도 높은 계급과 직책에 올랐다는 비아냥을 듣기 때문이다. 그는 능력이 없는 무위도식자라서 선공감 같은 한직에 있다는 말도 듣는다. 그래도 그는 주위의 입방아에 귀를 씻어 버린다. 그는 세상사에 별스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위인이다. 그는 바둑에만 몰두한다. 그래서 심심찮게 임효돈을 바둑 상대로 불러앉히기도 한다. 세 판만 두자고 해 놓고 다섯판 일곱판 그러다가 밤을 새기도 한다. 그러나 조순생은 내게 단 한 번도 바둑 한판 두지 않겠느냐는 말을 걸어온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같은 직급의 동료로서 쉽게 다가갈 수가 없다. 온화한 예의 속에 냉정한 거리를 느끼게 하는 위인이다.

"바둑은 저 세상 가서 실컷 두시오."

의금부 당직사령은 한참이나 지나서야 문득 이런 말을 툭, 던졌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조순생이 의금부 당직사령인 자신을 놀렸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 모두의 늑골 깊숙이 숨어있는 불안감에 대고 세치 혀의 칼날로 낮고 짧게 찔러버린다. 그러자 모두 끄응 이빨을 앙다물고 잠잠해진다. 아니 무기력해진다. 나는 이 무기력한 침묵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난다. 발걸음을 움직여 보지만 방향을 잃고 좁은 옥사에서 서성댄다. 제자리를 왔다 갔다 맴을 돌다 보니까 마음 속에 맺혔던 감정이 그만 솟구쳐 오른다.

"주군은 왜 내게 안여를 만들라고 하셨습니까? 왜 이 장영실이에게 수레를 만들라고 하셨습니까-"

느닷없이 내지르는 내 절규가 의금부 폐쇄된 공간에 강하게 부딪쳐 맴돌았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고 내 울음은 길고 긴 물줄기로 흘러 내렸다. 그동안의 숨은 설움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가 보다.

채방별감으로 수년간 외직을 떠돌면서도 주군이 언젠가 나를 불러 주리라 믿었다. 주군은 나를 필요로 하고, 나는 주군을 위해 존재하는 인간이다. 혹자는 주군이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외직으로 내몰렸다고 말한다. 또 다른 선의의 해석은 주군이 나를 보호해 주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명은 나를 범죄자 취급을 한다. 대놓고 도둑놈이라고 생각하고 더러운 모방꾼을 잡아 들이라는 명이 떨어졌다는 말도 들었다. 천만의 말씀이다. 모든 생각은 주군으로부터 나왔고, 나는 주군의 생각을 뒤쫓아 가면서 주군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만들었다. 나는 주군의 손이었다.

	장영실 역은 서울시립 뮤지컬단 수석배우 곽은태, 전통연희 살판의 부산출신 배우 강학수가 더블 캐스팅 되었다. 사진제공=국립극단(촬영 심철민)

(의금부 옥사에 붙잡혀 들어온 수레 제작자들은 인간 이하의 모욕과 폭행을 당하면서 졸지에 삭탈관직 당한다. 이미 예순의 나이에 이른 종3품 대호군 장영실은 사소한 실수 하나로 자신이 이루어 온 모든 업적과 명예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는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 문득 섬광처럼 스쳐 흐르는 의문과 만난다. "주군은 왜 하필 제게 수레를 만들라고 하셨습니까?")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