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한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2년 전 이맘 때 타계한 작곡가 박춘석(사진)을 지명하겠다. 물론 30년쯤 후에 K-pop 한류가 세계의 주류 음악으로 부상해 있다면 그때야 아마도 순위가 바뀌겠지만 그전까지는 박춘석의 지위를 위협할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K-pop세대에게 박춘석이란 아주 생소한 인물일 수 있다. 그보다 더 위인 30대 세대조차 그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열에 한둘 정도일 것이며, 40대 정도라면 "아, '초우'와 '흑산도 아가씨' 같은 히트곡 작곡가 아닌가" 할 정도일 것이다.

박춘석은 그저 수없이 명멸한 히트곡 메이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해방 후 한국 대중음악의 중흥기인 1960년대와 1970년대 20년을 완벽하게 지배한 통치자였고, 그의 스튜디오에서 트로트서 스탠더드 팝에 이르는 한국 대중음악의 문법이 찬란하게 완성됐다.

그는 유년기와 소년기를 일제 강점기에 보내고 해방과 분단으로 어지러운 1949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난 이듬해 학교를 그만두고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악단의 리더로 음악계에 들어섰다. 1954년 '황혼의 에레지'로 작곡가로 데뷔한 이래 1980년대까지 불멸의 명곡들을 토해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박춘석에겐 음악이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평생 2500곡이 넘는 곡을 발표했으며 그 중 1152곡이 저작권협회에 등록돼 있고, 그 가운데 히트곡은 300곡에 육박한다. 그는 지금 들어도 전율이 이는 수려한 멜로디 라인과 노래말을 악절 속에 녹여내는 완벽한 프레이징 감각으로 식민지 시대의 유산인 트로트와 해방 후 미국 문화의 상륙으로 이루어진 팝음악의 경계를 뛰어넘어 양쪽 모두를 지배한 최초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박춘석은 뛰어난 작곡가를 넘어 위대한 프로듀서였다. 1960, 197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의 빅4, 곧 이미자와 패티김, 남진과 나훈아가 모두 그의 사단의 일원이었고 그가 배출한 가수 만도 350명에 이른다. 패티김의 '초우'와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이미자의 생애 4대 히트곡 중 세 작품, '흑산도 아가씨' '기러기 아빠' '섬마을 선생님'이 모두 박춘석의 것이다. 남진의 출세작이자 최고의 트로트 히트곡 '가슴 아프게', 나훈아의 최대 명곡 '물레방아 도는데' 역시 박춘석의 영감에서 비롯됐다.

이외에도 슬럼프에 빠진 문주란을 극적으로 구출한 이른바 '공항 3부작'이나 1980년대 이산가족 상봉의 주제가가 된 곽순옥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같은 역사적인 노래 역시 박춘석의 작품이다. 한마디로 그는 한국 대중음악사의 미다스의 손이었던 것이다.

그는 생전에 옥관문화훈장을 받았고 타계한 직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오는 14일이면 그의 2주기가 된다. 하늘 나라에서 흐뭇하게 내려다 보고 있을 그의 영전에 바칠 최고의 영예는 흔하다면 흔한 그런 훈장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따서 그해 최고의 노래를 만든 이에게 주는 작곡상을 제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부가 그런 상을 제정한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