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플렉스 영화관 매표소 모습.

언젠가부터 극장에 자주 안 가게 되었다. 대부분의 멀티플렉스 극장이 백화점이나 대형 건물에 자리 잡고 있는 탓에 영화 한 편 보는 일이 고역이다. 너무 번잡한 것은 물론이고 영화가 끝나면 순식간에 몰려나온 사람들에게 떠밀려 얼떨결에 긴 줄을 서게 된다. 미화원들의 눈총을 애써 피하며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확인하고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도 엘리베이터 앞 병목 현상은 피할 길이 없다. 허둥지둥 극장을 빠져나와 얼른 그 곳을 벗어나려는 종종걸음에 영화의 여운을 되새길 틈은 밀려나고 없다.

새해 들어 극장에서 볼 상영작 몇 편을 골랐다. '치코와 리타'(감독 하비에르 마리스칼 외, 애니메이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세번째 사랑'(감독 리차드 J. 루이스), 멀티플렉스 극장에 딸려 있는 예술영화전용관에서나 볼 수 있는 영화였다. 차일피일 미루던 설 연휴, TV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다가 지역 케이블방송의 VOD 서비스로 이 영화들을 동시 상영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뒷북인가?). 관람료는 1만 원. 극장보다 2000원 비쌌다.

VOD로 보는 게 왠지 내키지 않아 접어두고 있다가 다시 확인해보니 이제 3500원이란다. 비교적 최근 개봉작인 '밀레니엄-여자를 증오한 남자들'(감독 데이빗 핀처), '초한지-천하대전'(감독 이인항)도 상영작 목록에 올라 있다.

세상 참 편해졌다. 극장에 가지 않고도, 불법 다운로드 따위 받지 않고도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최신 개봉작을 내키는 대로 골라볼 수 있는 세상이 턱밑까지 다다른 듯하다. 하지만 극장에서 영화만 보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라고 되묻는다면.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해의 어느 주말, 대학생이었던 나는 무작정 중소 도시를 떠돌다 천안시에 간 적이 있다. 낯선 곳에서 달리 할 일이 없어 들어간 극장에서 듣도 보도 못한 영화를 봤다. '누가 로저래빗을 모함했나'(감독 로버트 저메키스·1988). 영화를 보는 내내 짜릿했던 그 느낌은 천안역 앞에 있던 초라한 극장의 이미지에 녹아들어 지금까지도 화인처럼 남아 있다. 의기충천했던 열혈 영화기자 시절 '엠마와 부베의 사랑'(감독 이스트만 자보·1993)을 봤던 서대문 화양극장 뒷골목 푸른극장의 기억도 각별하다.

언제 다시 만나자는 기약도 없이 캐나다로 이민 가는 여자 친구와 통속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공항에서 이별하고, 찔끔찔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가릴 요량으로 황망히 숨어 들어 뜬금없이 '세상 밖으로'(감독 여균동·1994)를 봤던 충무로의 후미진 소극장. 1996년 첫 부산국제영화제 때 영화 깨나 본다는 사람들이 화질 흐린 비디오로 겨우 보고서도 어깨를 으쓱이며 자랑하던 '안개 속의 풍경'(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1988)을 필름으로 상영했던 남포동의 초대형 단관 부영극장. 2년 뒤 재일동포 최양일 감독의 '10층의 모기'(1998)를 봤던 감흥을 떠올리면 지금도 설렌다.

극장에서는 영화를 보는 것이 다가 아니다. 함께 본 사람과의 공감이 스며들고, 오고가는 길의 정취와 극장이라는 공간의 문화와 정서가 덧씌워져 누군에겐 추억이 되고, 어떤 이에겐 삶의 한 결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영화에 대한 특별한 기억에는 극장의 이미지까지 내장되기 마련이다. 기억은 이미지로 저장된다고 했다.

하지만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것이 거실 소파에 누워 VOD로 보는 것보다 뭐가 더 좋은지 잘라 말하기가 점점 망설여진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영화에 대한 '예의'이고, 더 가치 있고 교양 있는 문화 소비 방식이라고 주장했다가는 꼰대소리 듣기 십상이라니, 이를 어쩌나….

부산영상위원회 사무처장